전시 당하거나 인구에 회자되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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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 작성시각: 2011.08.24 00:4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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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8월 마지막


박승훈 개인전, `Travel Log – Italy, 세 도시 이야기`     



















            PYO GALLERY SOUTH(02-511-5295)             2011-08-19 ~ 2011-09-17 사우스에서는 8월 19일부터 9월 17일까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도시, 로마, 피렌체, 밀라노를 사진 작업한 작가 박승훈의 개인전을 연다. 사진 작가 박승훈은 16m 영화필름을 엮어 시각적으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작가이다. 가로 세로로 빼곡히 붙여진 16m 영화필름을 이용해 대상을 작은 조각 이미지로 분할 촬영하여 다시 그 필름들을 직물처럼 엮어나가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하나의 장면은 기억 속의 고리들처럼 엇갈리는 듯 모자이크처럼 연결되어 독창적이고 새로운 도시의 이미지로 재탄생 된다. 이번 전시는 오드리 햅번 주연의 영화 ‘로마의 휴일’의 배경이 된 도시 로마를 비롯하여 유서 깊은 중세풍의 도시 피렌체 그리고 개성있고 화려한 밀라노 등 로맨틱한 이탈리아의 풍경을 박승훈 만의 색깔로 세련되게 엮어낸 TEXTUS 시리즈 사진들로 늦여름 고즈넉한 여행의 기분을 선사해 줄 것이다. 시리즈는 TEXT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TEXTUS(직물)에서 비롯되었으며 직물의 씨줄과 날줄이 합쳐져 옷감이 되듯 겹쳐진 16m의 영화필름들이 해체되고 다시 엮어지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엮어진 4cm 남짓한 네모조각들은 하나의 완성된 풍경을 담고 있다. 설레임에 가득 차있는 여행객의 표정과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건물의 구석구석까지, 그의 렌즈에서 포착된 부분들은 비슷하거나 다른 모습들로 낯설지만 드라마틱한 장소를 연출한다 또 하나의 시리즈는 <보다 나은 설명>이다. 1년간 일정간격으로 강변을 촬영하여 한 장의 이미지로 서술해 나가는 이 시리즈는 근작에서는 피렌체의 아르노 강변을 따라 이어진 풍경들로 색다른 광경을 자아낸다. 시각적인 흥미로움 외의 시간, 공간에 따라 변화하는 풍경을 담은 이 작업은 강변을 중심으로 한 문명의 발달과 역사의 한 부분이 될 현재 역시 변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사진의 기록성을 잘 드러내주는 작업이다. 표갤러리 사우스에서 열리는 박승훈의 개인전은 총 20여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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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ments of Hope (소망의 순간) 展    





















                        핑크갤러리(070-8887-6388)             2011-07-26 ~ 2011-08-23 - 참여작가 : 안세권, 그레이스 림, 조은강 핑크갤러리에서는 2011년 7월 26일부터 8월 23일까지 한 달 동안 “The Moments of Hope (소망의 순간)” 전시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각기 다른 시선으로 소망의 순간을 사진으로 포착한 안세권, 그레이스 림, 조은강 세 작가의 작품 총 26점을 선보이는 전시입니다. 안세권은 1968년 정읍 태생으로 현재 서울에 거주하며 청계천과 월곡동 등 사라지는 도시 풍경과 변화하는 도시 풍경 모두를 현실적이면서 낭만적으로 사진과 비디오 작업을 통해 기록하는 사진작가입니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 스페인, 독일 등에서 활발한 전시활동을 하는 동시에 이번 핑크갤러리 4번째 기획전시에 참여하여 200호 4점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그레이스 림은 1961년 서울 태생으로 해외에서 30년 거주, 현재는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멀티미디어 작가 입니다. 샌프란시스코, 베니스, 뉴욕에서 작품활동을 왕성히 하며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2009), 폴란드 우치 비엔날레 (Lodz Biennale 2004), 베니스 비엔날레(2001) 등 참여, 2011년엔 뉴욕에서 개인전, Venice MAPPING PROJECT 전 등으로 해외에서도 열심히 활약하는 작가로 이번 전시에서 그녀는 자신의 삶을 배경으로 한 사랑, 소망, 자연에 관한 이야기를 작은 4점의 사진작품으로 선보입니다. 조은강은 1980년 대전 태생으로 현재 서울에 거주하며 터질듯한 꿈과 욕망을 비누방울을 통해, 붙잡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는 꿈의 찰나를 순간의 미학으로 표현하는 사진작가입니다. 그녀는 빈 사무실, 폐교, 오래된 기차, 모래로 뒤덮인 한적한 바다, 숲 등지의 적막한 장소를 배경으로 작업하지만, 우연의 순간들이 시적이고 진솔한 소망으로 표현됩니다. 그녀 작품 “The dream about to burst” 시리즈는 이번 전시에서 총 18점으로 선보입니다. 핑크갤러리는 주목 받는 국내외 작가와 세계 여러 나라의 작가들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아름답고 우아한 공간에서 우리 문화 예술에 이바지한다는 열정으로 언제나 참신하고 좋은 전시로 예술애호가와 모든 이의 문화예술 사랑에 동석하려 합니다.
















<이것이 미국미술이다-휘트니미술관>展은 20세기 초 뉴욕다다의 거장 만 레이로부터 재스퍼 존스, 로버트 라우센버그, 앤디 워홀, 클래스 올덴버그, 로이 리히텐슈타인, 제임스 로젠퀴스트, 댄 플래빈, 제프 쿤스 등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오브제Object'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현대미술의 거장 47명의 주요 작품 87점을 소개하는 특별 전시이다.
사전적으로 '물체'를 의미하는 '오브제object'라는 용어는 현대미술에서 마르셀 뒤샹이 反예술을 기치로 오브제를 미술 속에 던져놓음으로써 부각되었다. 오브제를 이용한 미술작품을 통해 일상적인 사물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는 이번 전시회는 '아메리칸 아이콘과 소비문화American Icon and Everyday Life', '오브제와 정체성 Object and Identity' 그리고 '오브제와 인식Object and Perception' 과 특별 섹션' 20세기 미국미술의 시작American Modernism'으로 구성된다. 오브제를 다루는 작가들의 서로 다른 의도와 방식은 몇몇 작품들의 경우에는 서로 다른 섹션에 중첩되어 분류할 수 있으나, 전시작품의 분류방식을 통해 작품의 의미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오브제에 배어든 미국사회와 문화를 동시에 읽혀질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번 전시회에서 20세기 초부터 현재에 이르는 미국 현대미술의 역동적인 역사를 오브제를 통해 감상하고 동시에 일상생활 속의 오브제가 동시대 사회와 문화를 어떻게 표출하는지, 그리고 이 오브제를 활용한 미술이 미국인의 삶과 생각을 어떻게 반영하지를 동시에 탐색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번 전시회가 산업화와 정보화를 넘어 창의의 시대를 마주하면서 관람객들에게 예술적 가능성을 뛰어넘는 새로운 도약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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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 of the Island (두 개의 섬)

김재남展 / KIMJAENAM / 金在南 / mixed media   2011_0805 ▶ 2011_0831


김재남_두 개의 섬 Two of the Island project-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60401b | 김재남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812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CSP111 ArtSpace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188-55번지 현빌딩 3층 Tel. +82.2.3143.0121 blog.naver.com/biz_analyst

김재남은 2006년 금호미술관에서 장난감 피규어와 뗏목 등을 이용한 사진, 회화, 영상설치로 『표류하는 영웅들』 프로젝트를 선보인 이후 6년만에 『두 개의 섬』이라는 타이틀로 개인전을 갖는다. ● 이번 전시에서 김재남은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가장 가고 싶은 섬' 중 하나로 TV프로그램 강호동의 1박2일로 친숙해진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서 배를 타고 2시간 남짓 거리의 '외연도'라는 섬을 다룬다. 작가는 주된 작업인 면천에 외연도 바다를 사실적으로 그린 흑백 목탄 페인팅 5점과 섬 속의 숲과 외연도 바다에 띄워진 텐트와 흰 깃발 등 현장설치 사진, 사진촬영 공간을 동일하게 재현한 동영상,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한 가상도시(외연도 섬) 동영상, 그리고 외연도에서 채집해온 오브제 설치 등 여러 매체장르를 혼합하면서 공간을 연극적으로 구성하여 연출한다. ● 두 개의 섬은 육지에서 바라다보는 섬과 통상 섬이라 부르는 섬에서 바라다보는 육지를 또 다른 섬으로서 은유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바다를 섬과 섬의 중간, 곧 고립의 경계에서 연결과 희망의 매개체로 본다. 김재남은 두 개의 섬, 그리고 바다를 통해서 국가와 개인의 자유와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 CSP111 아트스페이스
김재남_두 개의 섬 Two of the Island project-2011-8_3D 디지털 그래픽 비디오_00:04:06_2011
김재남-외연도에서 보낸 시간 ● 섬에 가고 싶을 때가 있다. 문득 육지에서 벗어나 사방이 트인 고립무원의 공간에 스스로를 '위리안치' 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가시로 담을 쌓는 대신 망망한 바다로 몸을 감싸 뭍으로부터의 완벽한 고립을 꿈꿔보는 것이다. 그 모든 관계의 망으로부터 자신을 끊어내고 싶을 때가 있다. 육지의 끝을 건너 섬으로 들어가면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작은 왕국을 상상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새로운 생을 가설하고자 하는 의욕을 키워보기도 하고 오로지 수평선만을 안기는 바다에 시선을 투항해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무로 돌려 버리는 것이자 자기 내면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일이다. 거대하고 장엄한 자연 속에 하찮은 육신을 마구 던져버리고 싶은 것이다.
김재남_두 개의 섬 Two of the Island project-Oeyun Island(South Korea)2011-2_ 캔버스에 목탄_110×220cm_2011
어쩌면 섬은 그 자체로 고독한 공간이지만 역설적으로 섬에서 육지를 보면 육지가 결국 섬이기도 하다. 사람들도 저마다 고립된 영역을 지닌 섬 같은 존재다. 그래서 사람들은 섬을 찾고 섬을 갈망하는 한편 섬과 관련된 무수한 이미지를 남기고 있는 것이리라. 해서 섬을 떠올리면 평생 바다와 섬만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던 김영수가 생각나고 박고석의 뜨거운 흑산도 풍경그림도 떠오르고 보길도로 들어가 그곳 풍경을 그리는 윤해남, 제주도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의 삶을 기록한 김옥선의 다큐먼트 사진, 육명심의 제주도 검은 모살뜸 사진 등이 연상된다. 그 외에도 섬을 다룬 여러 이미지들이 마구 덤벼든다. ● 섬은 작은 왕국 같다. 그 왕국에 찾아들어가 잠시나마 육지에서의 고단한 생의 회로와 무수한 인연과 제도의 사슬에서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모든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거친 바다바람에 마구 흔들리고 싶은 것이다. 오로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밀려드는 파도에 몸을 던져 그렇게 실감나는 실존의 감각만을 만끽하면서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김재남_두 개의 섬 Two of the Island project-Oeyun Island(South Korea)2011-5_ 캔버스에 목탄, 유채_각 50×50cm_2011 김재남_Two of the Island project-Oeyun Island(South Korea)2011-11_디지털 프린트, 디아섹_2011
김재남은 서해안에 위치한 외연도를 찾았다. 충남 보령시 오천면 외연도리 소재의 작은 섬이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연기에 가린 듯 까마득하게 보인다고 해서 외연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나는 가보지 못한 섬이고 해서 상상 속에서만 어른거린다. 외연도는 동쪽 끝에 봉화산, 서쪽 끝에 망재산이 솟아 있고, 가운데는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안은 남쪽과 북쪽에 각각 깊은 만과 큰 돌출부가 이어져 있다고 한다. 중국 대륙에서 무척 가까운 섬이라서 그곳의 닭 울음소리가 들린다고도 한다. 들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는 없다. 옛날 중국 제나라가 망할 때 전횡 장군이란 이가 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피난을 와 정착했다가 돌아갔다는 설이 있어서 지금도 그의 사당이 남아 있고 매년 그를 추모하며 풍어를 기원하는 제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도 한다. 이런 전해오는 이야기들은 무척 흥미롭다. 사실 이 섬도 나름의 깊고 아득한 역사와 사연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보낸 수없이 많은 이들의 생을 기억하고 있는 공간인 셈이다.
김재남_두 개의 섬 Two of the Island project-Oeyun Island(South Korea)2011-1_ 캔버스에 목탄, 유채_212×848cm(각 212×212cm)_2011
우연한 기회에 외연도를 찾아간 작가는 그곳을 여러 번 답사하고 이를 토대로 몇 가지 작품을 제작했다. 대천항에서 배를 타고 외연도로 찾아가는 여정은 흡사 낯선 땅을 여행하거나 그곳에 자신만의 작은 왕국을 세우는 흥분감을 안겨주었던 것 같다. 그 섬에서 며칠씩 보내면서 외연도가 남긴 인상을 추려보았다. 작가는 말하기를 섬에 들어가면 마치 어린 시절 집안 장롱에 몰래 들어가 숨었던 놀이의 추억이나 엄마 품으로 들어가 안기던 그 따뜻하고 편안하고 안락한 경험을 떠올려준단다. 그것은 양수 속에 잠기던 원초적 느낌, 질 속으로 들어가는 혹은 외부의 시선에서 벗어나 몰래 잠입하고 은거하는 다소 들뜬 느낌도 동반할 것이다. 어쨌든 작가는 그 섬에 들어가 하얀색의 깃발과 붉은 텐트를 갖고 설치를 했다. 바닷가 바람에 펄럭이는 작고 흰 삼각의 깃발이 꽂혀있고 그 옆에는 둥근 반원형의 풍뎅이 등 같은 붉은 텐트가 쳐져있다. 텐트는 거주공간이자 섬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외부로부터 자기 몸을 지켜주는 안락한, 최소한의 시설이다. 그것은 아주 작은 나만의 영역이자 개인성의 표식이고 초록으로 가득한 섬의 울창한 숲에서 삶을 이어가는 강렬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미친 듯이 휘날리는 깃발 역시 한 개인이 열망하는 자유의 함성을, 떨리는 실존의 욕망을, 그 어떤 제도와 규율에 속박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시각적으로, 촉각적으로 알려주는 신호다. 어쩌면 사람들은 저마다 섬이든, 도시든 그곳에서 자기만의 작은 왕국을 가설해서 맹렬히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재남_두 개의 섬 Two of the Island project-Oeyun Island(South Korea)2011-3_ 캔버스에 목탄, 유채_103×309cm(각 103×103cm)_2011
김재남은 외연도의 인상을 세 가지 색으로 추렸다. 초록색은 외연도의 산과 숲, 식물로 가득한 자연환경을 표상하고 파란색은 바다와 하늘, 붉은 색은 그 섬에서 살다 간, 살고 있는 이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아울러 작가는 외연도에서 받은 그 인상과 느낌을 회화와 사진, 동영상 그리고 오브제 작업으로 연출했다. 전체적으로 김재남의 작업은 마치 연극세트를 접하는 듯 하다. ● 우선 캔버스에 목탄으로 그려진 파도그림은 극사실로 묘사되면서 외연도로 밀려드는, 감싸고 있는 드라마틱한 파도의 생생함을 감동적으로 재현한다. 짙고 어두운 배경에 흰색, 여백으로 드러나는 파도는 마치 흑백사진처럼 정교하다. 이 재현과는 또 다른 회화는 추상인데 그것은 외연도를 색채와 질감만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각각 녹색과 붉은 색, 푸른 색 물감의 단일한 색상으로 칠해진 화면은 앞서 언급한 그 색채의 상징적 내용을 동일하게 감싸안으면서 매우 환상적인 화면이자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력을 자극하는 표면을 만들어 보인다. 사진은 외연도 내부의 숲을 찍었는데 그 안에 작가가 설치한 텐트와 꽂혀진 깃발이 펄럭거리는 장면이다. 이는 영상작업으로 동일하게 재현된다. 우리는 그 영상작업을 통해 흡사 외연도로 여행 온 듯한 가상의 체험을 맛보면서 섬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간다.
김재남_두 개의 섬 Two of the Island project-Oeyun Island(South Korea)2011-4_ 캔버스에 목탄, 유채_103×309cm(각 103×103cm)_2011
또 다른 영상작업(두 개의 섬)은 컴퓨터그래픽으로 재현한, 수직의 빌딩으로 가득한 가상의 도시와 외연도 형태의 섬이 서로 오버랩 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마치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새의 이동의 시선으로 포착한 이 장면은 외연도 속으로 도시의 빌딩이 혹은 도시 속으로 외연도가 가라앉거나 떠오르거나를 반복하면서 극단의 공간을 충돌시킨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 극단의 두 공간을 넘나들며 살아가고자 욕망한다. ● 마침 사진작업 앞에는 외연도에서 채집한 나무토막과 몇 개의 돌들이 놓여있다. 특히 이 나무토막은 사진과 동영상 촬영장소인 외연도의 상록수림 숲에서 자란 동백나무의 편린이다. 천연기념물 제136호인 그 나무토막의 표면에 작가는 외연도의 윤곽을 새겨 넣었다. 비릿한 바다 내음과 눅눅하고 서늘한 숲의 체온, 아득한 시간에 의해 그렇게 닳고 깍인 나무토막과 그 표면에 부감되는 외연도의 실루엣을 보는 이들에게 안겨주면서 새삼 외연도란 섬, 더 나아가 저마다 고립된 사람들의 왕국, 그리고 그들이 모여 사는 국가와 사회 안에서의 자유와 희망 같은 이야기들 역시 들려주는 것이다. 가득한 안개의 질감과 거칠게 펄럭이는 깃발소리와 격렬한 바람과 파도소리를 동반하면서 말이다. ■ 박영택 ----------------------------------------------- 설기효展 / SHIRGHYO / mixed media.installation 2011_0812 ▶ 2011_0828 / 월요일 휴관
설기효_의(意)_들꽃, 들풀, 흙, 소리_가변크기_2011

초대일시 / 2011_0812_금요일_06: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 Insa Art Space of the Arts Council Korea 서울 종로구 원서동 90번지 Tel. +82.2.760.4722 www.arkoartcenter.or.kr


색과 소리로 갱신되는 언어 ● 소박한 들꽃과 복잡한 컴퓨터 프로그램이 동시에 등장하는 설기효의 작품전 제목은 이름붙일 수 없는 색의 띠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에 나오는 색 면 추상같은 단색 회화들은 언어를 색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는 같은 의미를 가지는 세계 각국의 언어를 평균 색으로 낸 결과물도 포함된다. 비슷한 색감을 가지는 정방형 판들은 다양한 언어에 깔려있는 보편성을, 논리가 아닌 감각으로 확인시켜 준다. 언어는 소리로도 치환되어 있어 전시장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하나의 언어로부터 또 다른 언어로의 전환에는 음양오행이라는 동양의 세계관과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는 서양의 논리가 모두 동원된다. ● 설기효의 작품은 동양철학이 깔려 있으면서도 관념적이지 않고, 복잡한 기계적 과정들을 거치면서도 새로운 장치의 현란함에 매몰되지 않는다. 삶과 작업을 일치시키려는 작가의 태도는 몸을 중심에 놓으며, 관객의 직관에 호소한다. 작년에 갤러리 쿤스트독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는 자신의 맥을 소리와 영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심신의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맥이 뛰는 형태를 오행으로 분별하는 '음양오행 맥진법'이 활용되었다. 또 다른 언어로 번역된 몸의 소리는 하늘색의 변화만큼이나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 전시는 살아있는 것의 본성이 운동과 변화임을 강조한다.
설기효_의(意)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_2011

이번 전시에서 설기효는 동양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언어를 소리와 색으로 바꾼다. 미술은 언제나 어떤 내용을 조형언어로 바꾸는 것이었지만, 이 전시에서 변환은 단지 은유적인 것이 아니라, 일련의 규칙을 통과한다. 변환의 결과물은 자의적이지 않으며, 어떤 필연성을 띤다. ● 전시장 1층은 전시의 주제와 원리를 요약한 144음절과 440여 음소를 색과 소리로 치환한다. 144자의 평균색은 녹두 색으로, 바닥에 깔린 풀밭의 색과 비슷하다. 전시장 바닥에 심어놓은 들꽃과 들풀은 색으로, 피아노곡부터 펑크까지 다양하게 편곡된 소리로 나온다. 지하 전시장에는 하얀 실로 만들어진 입체 스크린에 영상이 투사된다. 공중에 붕 뜬 상자 같은 입체 스크린은 뿌연 연무의 느낌을 준다. 영상 설치작업인 「흡호」는 50개국 언어의 들숨과 날숨을 색과 소리로 치환한 것이다. 작업개념을 요약한 144자의 평균 색, 흡과 호를 나타내는 50개국 언어의 평균 색, 그리고 '간다, 온다'라는 말의 50개국 언어의 평균 색이 130x130cm 크기의 정방형 캔버스에 칠해졌다. 색의 평균값은 내는 과정은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지만, 언어가 일정정도의 양을 넘어서면 평균색은 대부분 누런빛을 띈다. 작가는 여기에서 땅에서 만물이 나오는 동양적 세계관을 확인한다.
설기효_흡호_실, 스테플, 영상(00:10:11)_가변크기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_2011

또 다른 층에서는 언어를 소리와 색으로 치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전시한다. 여기에서 관객은 언어의 의미는 확인할 수 없고, 소리와 색으로만 감각 할 수 있다. 언어를 색과 소리로 만드는 작업은 기호의 재현이 아닌, 마음의 운동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를 질서화 이전의 힘을 끄집어내는 행위라고 간주한다. 설기효가 작업 초기부터 견지해왔던 '언어의 빛, 빛의 소리, 소리의 색'이라는 다층적인 치환의 과정은 추상적인 언어를 보다 구체적인 색과 소리로 돌려놓는다. 작가는 색과 소리로의 치환에 있어 중요한 것은 색과 색이 만들어내는 대비, 소리와 소리가 모여 이루는 음률과 리듬 즉, 관계라고 본다. 모음은 음양, 자음은 오행에 기초하는 한글의 원리를 색과 소리로 바꾸어 봄으로서, 언어의 의미를 확장한다. 한글 뿐 아니라 음소문자라면 그 어떤 언어도 치환이 가능하다고 한다. 작가는 다양한 언어로 작업함으로서, 핵심적이고 보편적인 단어들이 비슷한 색감으로 나타나는 사실을 발견한다. 설기효의 작업은 추상화된 현대의 언어의 기원에 다가감으로서 언어의 풍부함을 되살리려 한다. 그 기원에는 색과 소리가 잠재해 있다. 모든 예술의 표현은 기존의 언어를 새롭게 하는데 목적이 있지만, 설기효의 경우 언어적 문제를 작품의 전면에 세운다.
설기효_흡호_부분

상징으로 관습화된 언어로서는 새로운 것을 말할 수 없다. 설기효의 작품 속 소리와 색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상징적 언어의 밑바탕에 있는 원동력을 암시한다. 그것은 크리스테바가 언어를 생볼릭le symbolique(구성적 언어, 상징계)과 세미오틱le semiotique(본원적 언어, 기호계)로 구분한 것을 연상시킨다.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정신분석」에서 생볼릭은 문법상의 규칙, 기호기능, 기표와 기의, 지시대상 등과 논리-의미론적 분절 기능 등을 맡는 것이며, 이와 대립되는 세미오틱은 전(前)언어적, 초(超)언어적 언어라고 본다. 생볼릭은 의식의 산물로서 통사론적 질서에 따라 기호 간의 결합에 의해 형성되지만, 세미오틱은 음절형성 이전의 상태의 언어이다. 세미오틱은 육체적 충동의 힘이 의미화 내부에서 완전히 억압되지 않는다. 크리스테바는 사회적 언어의 출발 이전에 모태 속에서 교환되는 육체적 신호에 주목한다. 다른 언어학자와 달리,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기호적 관계에서 진정한 언어의 출발을 본다. 아이는 구문을 배우기에 앞서 멜로디와 음악을 배운다. 구문의 법칙을 배우기에 앞서 먼저 억양을 모방하는 것이다. 설기효는 작품을 통해 아이가 언어를 습득할 때와 같은 원초적 조건을 만든다. 그것은 언어에서 소리와 리듬을 주목함으로서, 기성의 언어 속에서 새로운 내용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상징적 단계에서는 낱말이 의미화 하는 반면, 기호적 단계에서 낱말은 행동하고 활동한다. ● 크리스테바에게 기호계는 상징계를 초과하는 것이며, 언어의 변방과 한계에서 작용하며 효력을 발생시킨다. 언어의 생사회적(bio-social) 요소로서의 기호계는 충동의 저장소로 언어에 충동을 끌어들인다. 언어를 통한 충동의 방출에서 발견되는 쾌락은 의미와 표상을 초과한다. 언어는 결코 충동을 표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충동을 활성화시킨다. 이러한 활성화는 특히 예술적 언어에서 명백하다. 충동은 이질적 물질의 운동인데, 이를 억압하지 않는다면 상징적 통일은 없다. 그러나 충동은 상징계의 통일에 도전장을 냄으로서, 그 통일체가 과정 속의 한 순간임을 밝힌다. 언어의 다양한 구성요소로의 분석과 종합이 행해지는 설기효의 작품에서 언어는 이질적으로 나타나며, 언어적 존재인 주체 역시 이질적이다. 언어의 기원에는 이성이 아니라 육체가 있다. 설기효의 작업은 육체를 배제하지 않는 언어와 육체의 흔적을 상징화하려는 이중의 지향이 존재한다. 가령 이전 전시에서 변화무쌍한 하늘을 바라보는 자신의 맥--작가는 맥에서 몸의 기호를 알아챈다--을 색과 소리로 치환한 작품에서 이러한 이중의 지향이 분명하다.
설기효_언어소리색 프로그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_2011

이번 전시에서 3명이 치는 박수소리로 박자를 만든 음악에도 상징 언어의 밑바탕이 되는 원초적 리듬이 나타나 있다. 언어의 기원에는 소리가 있다. 설기효의 작품에서 언어를 분석하고 종합함으로서 만들어진 다양한 소리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음악이 된다. 장 자크 루소는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말과 글을 구별한다. 그는 인간은 말할 때 감정을 표현하고 글을 쓸 때는 생각을 전달한다고 본다. 글을 쓸 때는 모든 낱말을 통용되고 있는 뜻의 범위 안에서 써야한다. 그러나 말하는 사람은 어조로서 뜻을 변조하고 자기 맘에 들도록 뜻을 정한다. 명확하게 표현해야할 부담이 덜하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글의 개념보다는 말의 소리에 주목하는 설기효의 작품은 예술의 근본적인 충동에 충실하다. 루소는 인간의 정념은 이성에 앞서 말을 하게 했다고 본다. 언어는 생각을 표현한다. 하지만 감정과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리듬과 음이 더 필요하다. 그러나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언어는 더 정확해지면서 정념적인 면이 줄어든다. 그런 언어는 감정을 개념으로 대체한다. 그것은 마음이 아닌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 그리하여 언어는 더 정밀하고 명확해지지만, 더 밋밋하고 더 희미하고 더 차가워진다.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촉구하는 루소는 기하학자의 언어와 유사한 현대가 아니라, 시인의 언어와 유사한 최초의 상태를 동경한다. 체계적 추론보다는 음악적 느낌을 중시하는 것이다. 루소가 말하듯이, 언어를 더욱 힘 있게 하는 것은 소리와 악센트와 온갖 굴절들이다. 설기효는 서로 분리된 말과 음의 관계를 다시 환기시킴으로서, 말의 힘과 음의 의미를 동시에 강화한다. 작품의 논리와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은 명확하지만, 그것은 복합적인 것을 하나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다. 작품들은 언어들 간의 치환은 절대 값보다는 관계를 중시한다. 그것은 기호 자체보다 기호적 차이를 중시한다. 메를로 퐁티는 소쉬르를 통해 각 기호가 그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으며, 각각의 기호는 하나의 의미를 표시하기 보다는 그것과 다른 기호들 간의 차이를 나타낸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기호들의 경계에서 의미가 생겨나듯 부분 속에서 갑자기 전체가 돌출할 수 있는 현상을 주목한다. 여기에서 기호란 서로 내포되거나 구별되는 방식일 뿐이다.
설기효_언어소리색 프로그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_2011

이러한 상대성을 보여주는 것 중에서 색채만큼 분명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색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색의 영향을 통해 또는 빛과 그림자를 통해 변화 된다'고 불평했다. 언제나 명석 판명한 개념을 중시하는 철학적 사조는 명확한 형태에 비해 불확실한 색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거둔 적이 없다. 색은 인간의 관점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가변적인 색은 시점의 고정을 통해 늘 상 분명한 것을 탐색하는 시각보다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청각과 더 잘 어울린다. 이처럼 소리와 색이 동시에 등장하는 설기효의 작품은 공감각(synesthesis)적이다. 공감각을 통해 하나의 감각은 또 다른 감각으로 번역된다. 설기효의 작품은 동양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공감각적 사고는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무려 50개국 언어를 조사하여 만든 설기효의 작품들에는 보편성을 확인하려는 의지가 있다. 가령 공감각은 '나는 모음들의 색깔을 창조했다. 그리고 각 자음의 형태와 움직임을 정리했다'고 주장한 랭보의 시부터 '나는 색깔들의 소리를 들었다. 초록 소리, 붉은 소리, 노란 소리가 전혀 다른 파동으로 다가왔다'는 테오필 고티에의 주장에 까지 이른다. ● 근대를 거치면서 감각은 분화와 자율화를 거듭했다. 그것이 낳은 생산성 이면에는 빈곤이 있다. 설기효의 작품은 언어의 소리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서, 근대의 시각 중심 문화를 반성 한다. 마샬 맥루한이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주장하듯이, 인쇄에 바탕 하는 근대의 시각 문화는 명시성, 획일성,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비시각적, 즉 비문자적 양식은 함축성, 동시성, 불연속성을 만든다. 시각적 관점의 세계는 획일적이고 동질적인 공간이며, 그러한 세계는 공명적인 다양성을 낳는 구어와는 거리가 멀다. 언술(speech)이란 5개 감각 모두를 한 순간 밖으로 외화 하는 것인데 반하여, 글을 쓴다는 것은 말로부터 시각적인 것만을 추출하여 외화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컴퓨터를 비롯한 전자매체가 활용되는 설기효의 작품은 근대의 선적 언어를 전기적 정보구조라는 동시적 장(場)으로 변화시킨다. 작가는 선형적인 시각적 공간으로서의 문자에 색이나 소리같은 비문자적인 것들을 환기시킴으로서, 동시성(simultaneity)을 부각시킨다. 보다 전체적인 소통을 지향하는 융통성이 있는 동양의 사고에 뿌리를 두는 설기효의 작품은 전자매체의 시대에 되돌아온 소리의 위력을 다채롭게 표현한다. ■ 이선영




박미현展 / PARKMIHYUN / 朴美賢 / drawing 2011_0816 ▶ 2011_0830
박미현_드로잉_한지에 샤프펜슬_63×93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1106b | 박미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816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안국동 7-1번지 Tel. +82.2.738.2745 www.gallerydam.com


199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종이와 연필, 펜 등을 이용한 드로잉작업을 해온 박미현의 드로잉전시가 갤러리 담에서 열린다. 작가는 1998년 첫 개인전에서는 종이와 7H~9H의 흐린 연필로 '재현'의 문제에 천착하여, '주체-대상-그려진 그림-관객'과의 관계와 '시간성'에 대해 탐구하였고, 1999년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플라스틱 필름에 유성 펜을 사용해 무수한 점들을 반복적으로 찍어, 순간의 시간을 포괄하는 보다 큰 시간성에 대해 사유했다. 2006년 세 번째 개인전에서는 수채화지에 0.4mm 검정 수성 펜을 사용해 기하학적 형상과 우주의 형상을 드로잉했다. 제작에 긴 시간이 요구되는 반복적이며 수행적인 드로잉이었으며, 이때 그려진 풍경은 자연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닌 관념적이며 추상화된 풍경이다. 플라톤과 그의 영향을 받은 플로티누스의 철학과 미학적 문제에 흥미를 느끼고 공감하였는데, 이들은 육체를 초월한 '좋음'의 세계를 설정하고 이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인간이 끊임없이 '자기연마'해야 함을 역설한다. 보다 큰 선(신이든, 자연이든, 어떤 다른 초월적 힘이든)이 있다고 전제한다면, 개인은 보이지 않는 큰 존재 앞에 선 겸손한 존재로, 자신을 바라보고 타자에 대해 '연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현실적인, 윤리적인 삶의 태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연관해 고대 기하학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신성한' 도구인 컴퍼스, 자 등을 이용해 여러 기하학적 형상들과 '플라톤의 입체'를 드로잉했다. 이 과정에서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관계성' 아래에 놓여 있으며, 세상의 사물과 사건들의 다양한 변주는 '하나의 커다란 질서'에 통합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첫 개인전에서 보였던 세계관과는 상이한 것으로, '순간의 세계'에서 '영원의 세계'로, 세계를 보는 관점이 이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한정된 삶에서 영원, 즉 초월적인 힘을 전제한다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일이기도 하다. 세계 속의 한 개인이 취해야할 '좋은' 삶의 태도를 환기시키고, 치유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예술의 한 역할이기도 할 것이다. 지난 해 '플랫폼플레이스629'에서 열린 네 번째 개인전에서는 이런 관심의 연장으로 샤프심과 한지를 이용해 기하학적 형상들을 드로잉했다. 올해 '갤러리 담'에서의 다섯 번째 개인전에서도 같은 개념으로 작품을 제작, 전시할 예정이다.
박미현_한지에 샤프펜슬_63×93cm_2011
박미현_한지에 샤프펜슬_63×93cm_2011

재료적인 측면에서는, 이번 전시 역시 한지(음양지, 유지油紙)에 샤프심으로 섬세하게 제작한 드로잉이 주가 될 것이다. 흑연은 기존에 사용했던 0.4mm 펜에 비해 필압이 덜해 부드럽고 번짐이 좋은데, 0.5mm 샤프펜슬을 사용하면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면서도 부드러운 표면효과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닥나무를 재료로 하여 표면을 잘 압착한 한지(음양지)는 견고하며 표면이 매끄럽고, 수채화지에 비해 흑연이 뭉치지 않고 번짐이 좋다. 유지는 일반 한지에 비해 안정적이지는 않지만 기름을 먹은 누런빛이 인공적이지 않고, 흑연과의 조화도 차분하다. 한지의 그 오래되고 익숙한 느낌이 이번 드로잉전의 개념에 적절하다는 생각에서 힘들고 고된 드로잉 작업을 하고 있다.
박미현_유지에 유채_46×53cm_2011

한지로 제작된 작품은 재료의 특성상 판넬에 배접해 시리즈별로 나열하는 구성이 될 것이다. 정적이고 수평수직이 강조되는 전시 연출을 계획하고 있다. 최근 미술계의 작품 경향이 대체로 서사적이고, 즉물적이라는 느낌인데, 그에 반해 무채색의 추상적이고 사색적인 풍경들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번 전시에는 근작 15여점이 출품될 예정이다. 박미현 작가는 덕성여대와 동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으며 이번이 다섯 번째 개인전이다. ■ 갤러리 담
박미현_유지에 유채_46×53cm_2011
박미현_유지에 유채_46×53cm_2011

박미현 드로잉전_연습: On Overgrown Paths ● 한지와 유지油紙에 샤프펜슬과 유화물감을 이용한 드로잉작업이다. '기둥모티프'의 조합과 변주로 육각형 등의 기하학적 형상을 드로잉하거나 '알'모양을 드로잉했다. 이 단순한 형태들은 시원始原의 형상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보인다. 비슷한 형태와 색채가 반복적으로 사용된 듯 보이지만, 작은 차이로 섬세한 뉘앙스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샤프펜슬드로잉의 경우 같은 형태 안에서 선의 방향을 달리한다거나, 유화드로잉의 경우 기름과 유성미디엄의 농도를 달리하여 톤tone에 변화를 주는 식이다. 재료와 형태의 작은 변주들로 무수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이 차이들은 일정한 규칙과 통일성으로 수렴된다. ■ 박미현





한국현대형상회화 2011

Korean figurative painting 2011 2011_0817 ▶ 2011_0830



공성훈_비행기구름_캔버스에 유채_227.3×181.8cm_2011

초대일시 / 2011_0817_수요일_06:00pm 초대작가 공성훈_김보중_김지원_김진열_류준화_박불똥_안창홍 이문주_이샛별_이흥덕_장경호_정복수_최경선_최민화 후원_관훈갤러리 관람시간 / 10:30am~06:30pm 관훈갤러리 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80년대부터 자생적 뿌리를 형성해온 『한국현대형상회화』가 올해로 어언 30년의 세월을 맞는다. 주지하듯이 『한국현대형상회화』는 이른바 '80년대 미술운동'을 뿌리로 하여 우리의 역사와 시대현실에 대한 자각, 인간적 삶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그 생명력을 길러왔다.
김보중_안창마을_캔버스에 유채_73×182cm_2011
김지원_무제_리넨에 유채, 실크스크린_118×228cm_2009
김진열_훈수_합지, 양철, 아크릴_107×107cm_2011
류준화_접시꽃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콘테,라임_162×130.3cm_2011
박불똥_그림자 위에 서다_캔버스에 유채_194×130cm_2010
안창홍_문신한 남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114cm_2010

『한국현대형상회화』전은 지난 30년의 궤적을 통해 『한국현대형상회화』가 온축해온 '형상성'의 내포와 외연, 그 지층으로 부터 뻗어나간 줄기세포의 맥을 더듬고자 기획되었다.
이문주_유람선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5×360cm_2009
이샛별_스무개의 그림자_캔버스에 유채_180×145cm_2011
이흥덕_타이거 마스크_캔버스에 유채_193.9×259cm_2011
장경호_묵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72.7cm_2011
정복수_세상의 질서2_캔버스에 유채_259×194cm_2007
최경선_빈집 앞_캔버스에 유채_140×160cm_2011
최민화_봉천3동_캔버스에 유채_145×112cm

그런 의미에서, '한국현대형상회화' 1세대가 자생적으로 정초하고 다져온 '시대'와 '삶'을 아우르는 '형상성'을 올바르게 자리매김하고, 갈수록 다원화, 다층화 되는 현대사회 내에서 다양하게 제기되는 제 문제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고 도모하는 동시대작가들의 작품을 더해 당대 사회의 틈을 관류하는 회화적 '형상성'의 의미를 캐내는 일은 '한국현대형상회화'의 질적 위상을 가늠하고 담보해내는 것에 다름 아니라 하겠다. ■ 한국현대형상회화 운영위원회




고 무 나 라RUBBER BAND 100%

이정희展 / LEEJUNGHEE / 李正喜 / installation 2011_0817 ▶ 2011_0908



이정희_벤치에걸친 고무질_노란고무줄_250cm(늘어남)_201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11_0817 ▶ 2011_0822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2층 Tel. +82.2.734.1333 gana.insaartcenter.com 2011_0825 ▶ 2011_0908 관람시간 / 10:00am~06:30pm 갤러리 Art3325 GALLERY Art3325 경남 창원시 마산 합포구 중성동 33-25번지 2층 Tel. +82.55.224.3325 cafe.naver.com/art3325


데페이즈망-우연한 만남, 낯선 관계 ● 작가들은 작업에 대한 주제를 선택하고 그것에 대한 표현 방식과 자신의 언어를 이루고자 무수히 반복하고 탐구한다. 무한 복제가 가능한, 예컨대 사진이나 판화, 기계로 생산하는 조각 작품들에 제한적인 일련의 번호가 주어져 생산을 통제하면서 작품의 가격을 매기는 행위를 넘어, 새로운 미디어와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의 새로운 소비구조가 너무도 빠르게 만들어져 가고 있다. 사실, 어떤 매체를 사용하는가 보다는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는가가 작품의 핵심적 요소일 것이다. 작가 이정희는 일회성을 가지고 소멸할 수밖에 없는 아주 작은 존재인 사물이(일회용 고무질) 사물과 사물, 사물과 공간사이에서 흐르는 각각의 근본적인 존재감을 부여하여 그 사이를 관조하는 정신의 흐름을 나타내고자 한다. 일상적 평범한 사물을 이용해 우리의 상식과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시적인 이미지를 표현해 낸다. 작품의 제작과정을 보면 작은 고무질을 하나하나 뜨개질하듯이 매듭지어 서로 뉴우런 처럼연결시켜 간다. 서로 매듭으로 연결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조형작업의 고유의 영역이 유연하게 활용되고 표현영역을 확장시킨다. 데페이즈망은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낯익은 물체를 뜻하지 않는 장소에 놓음으로서 보는 사람에게 심리적 충격, 혹은 마음 속 깊이 잠재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예술에 있어서 미술의 기본요소에 대한 집착 보다는 인간을 이해하는 진지한 실험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상상력을 해방시켜 사람들에게 과학적인 면 보다는 은유에 의한 시적인 면을 더 의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논리의 영역이 아닌 숨겨진 진실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세계는 현실의 대상들이 존재하는 예술적 소재를 길어 낼 수 있는 더 풍부한 원천 일지도 모른다. 이정희의 작업에서의 특정한 형태는 한가지의 의미나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다. 형태의 고유한 의미가 없고 그것이 새로운 역할을 맡는 순간 의미가 생겨난다. 그것은 형태 보다는 물화된 움직임 그 자체이고, 물질로서의 대상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 그 행위가 다른 존재자와 사물을 연결시켜 주는 지점을 만든다. 작은 고무질로 만들어진 컵과 주전자는 친숙한 일상 소재의 변형에 대해 당혹감을 느끼지만 이러한 방식의 사물의 변형이 꿈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친숙한 것이다. 그의 작업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의식되어 있지 않더라도 확실히 존재하는 어떤 욕망을 만족시켜 주고, 가장 일상적인 사물에 생명력을 불어 넣기 위해 그것들 사이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현숙
이정희_나무에걸린 고무질_노란고무줄_100×100cm(늘어남)_2011
이정희_돌에걸린 고무질_노란고무줄_100×100cm(늘어남)_2011
이정희_땅에떨어진 고무질_노란고무줄_100×100cm(늘어남)_2011

그림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 그림을 참 열심히 그리는 사람이 있다. / 그래도 참 못 그리는 사람이 있다. / 그래서 그림그리기가 항상 망설여지는 사람이 있다.
이정희_못에걸린 고무질_노란고무줄_250cm(늘어남)_2011

고무줄은 '망설임 없는 표현 도구 찾기' 작업을 하면서 발견한 두 번째 도구이다. 자유로운 표현을 가능하게 한 고무줄 작업은 어릴 적 기억에서 시작된다. 어쩌다 생긴 노란 고무줄을 손목에 끼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이것저것 만들곤 했다. 고무줄로 표현된 형태들은 일정한 규칙이 있어야 했지만 그 규칙을 습득하는 것 또한 재미난 놀이로 여겨졌기에 항상 즐길 수 있었고, 규칙을 습득함으로써 또 다른 표현을 가능하게 하였다. ● 처음에 고무줄작업은 틀을 이용해 끼우거나 엉키게 하여 형태를 만들었는데, 그런 작업은 표현하고자 하는 형태의 한계가 있었고, 결국은 처음 생각과 다른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지금의 고무줄작업인 고무질(고무줄+뜨개질)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뜨개질 방법과 유사한데 그것은 규칙을 찾기 위한 것이다. 그 규칙으로 인해 하나하나 떨어져 있는 고무줄을 연결할 수 있었고,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 있었다. 노란고무줄로 표현된 형태에는 사적인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데, 관객의 시선을 소재이자 주제인 고무줄에 의도적으로 집중시킴으로써 망설임 없는 표현을 하고자 하였다. ■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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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전: 산해경 exist, but doesn't exist




박승예展 / PARKSEUNGYEA / 朴昇藝 / painting 2011_0817 ▶ 2011_0830




박승예_feMALE Deer_종이에 아크릴채색, 펜_150×13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박승예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817_수요일_06:00pm

2011 미술공간現 기획작가 공모 당선자

관람시간 / 평일_10:00am~06:00pm / 주말_11:00am~06:00pm

미술공간현 ARTSPACE HYUN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B1 Tel. +82.2.732.5556 www.artspace-hyun.co.kr




이번 박승예 전시는 미술공간現이 작가발굴이라는 큐레이팅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는 제4회 기획공모에 당선자로서 진행되는 전시이며, 현대미술의 잠재력을 가진 참신하고 실험적 작업세계를 가진 작가발굴을 위해 매년 진행해오는 기획공모전이다. 선정은 김상철(미술평론가), 박영택(경기대 교수), 석철주(추계예술대 교수), 하계훈(단국대 교수) 심사위원 4분의 공정하고 투명한 심사를 거쳐 만장일치로 선발되었다. 앞으로도 미술공간現에서는 다양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작업세계를 펼쳐가는 열정을 가진 작가들을 위해 폭넓은 지원과 후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 기획공모 당선자 박승예는 어여쁜 이름을 가진 것과는 달리, 그녀의 작품은 단적으로 '그로테스크'하다. 금번 기획전시의 주제가「괴물전, "산해경"」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당연하게 보인다. "산해경"이란, 중국의 고대 지리책으로 나라 안팎의 산천이나 바다에 사는 이물, 날짐승의 종류부터 중국의 신화, 전설 및 제사에 관한 것에서부터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을 싣고 있다.
박승예_A Hand Bug_종이에 아크릴채색, 펜_150×130cm_2011


그녀의 작업은 '선'이라는 기본적인 조형언어를 볼펜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표현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는 그녀의 내적 자아(내 안의 괴물)와 외적 자아(내 밖의 괴물)가 만나 서로 그 존재들을 인식하고, 그것들이 두려움을 통해 "깨어 있는 주체"로 승화하도록 하는 상황들을 제시하고 있다. 즉, 그녀는 작품 속에서 내 안의 괴물과 내 밖의 괴물이 충돌하면서 생성되는 아픔을 통하여 관람객 자신들도 스스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 작가의 작품은 실험적이며, 볼펜이라는 어찌 보면 우리에게 친숙한 도구를 통해 괴물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괴물의 이미지를 보며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절대로 회피할 필요는 없다. 왜냐 하면,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사회자체가 이미 우리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두려움이 가득한 사회 속에서 부단히도 노력하고 전진한다. 이처럼 '괴물의 이미지'라는 두려운 이미지는 우리가 사회라는 두려운 존재와 공존하며 열심히 살아가며 생존해 갈 수 밖에 없는 당위성과 맥을 같이 한다. ● 작품을 감상하며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벌써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문제에 직면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수없이 겪고 있다. '괴물'은 단순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한계를 시험하고 도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존재다. 그런 관점에서 그녀의 작품은 우리에게 고마운 존재다. 하지만, 이를 관람객이 어떻게 받아들일 지는 그들 자신들의 몫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명언이 있다. ●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 김경민
박승예_3M_종이에 아크릴채색, 펜_150×130cm_2011


박승예 - 내 안의 불안, 불안한 괴물 자화상 ● 산해경이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백과사전인데 이 책을 보면 기이한 새와 동물들, 신선과 마귀 등의 흥미로운 이미지가 등장한다. 당시 사람들이 상상해낸 온갖 괴물과 두려운 존재의 표상이 가득하다. 고구려 고분 속의 조인(鳥人)들이 그 안에서 출몰하기도 한다. ● 박승예 역시 상상해낸 공포스러운 괴물의 이미지를 그린다. 그런데 그 괴물은 다름 아닌 자신의 얼굴 속에서 피어난다. 얼굴 속에 감추어진 또 다른 얼굴, 자기 내면이 품고 있던 또 다른 자아상이다. 그림이 정교하고 강렬하다. 볼펜으로 그린 그림인데 그 기법과 묘사력이 돋보인다. 그리고 얼음 같이 문장을 시각화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테라페이퍼라는 중성지 위에 볼펜을 계속해서 굴리면서, 원형의 선을 반복해서 끄적거렸다. 둥근 원형의 선들이 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온통 꼬불거리는, 라면발 같고 곱슬머리 같은 선으로 채워졌는데 추상표현주의적인 이 선들이 모여서 선명한 구상을 보여주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내부는 복잡하게 꼬였고 난해하고 미스터리지만 그것들이 모여서 반듯한, 그러나 부분적으로 균열이 일어나고 인간과 동물이 섞이고 손과 얼굴이 들러붙는 변종, 기형이 탄생했다. 집요하고 치밀한 그리기이자 그리는 노동과 시간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작가는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노동이라기보다는 좀 삭신이 쑤시는 유희 같다"고 말한다. 그 유희를 통해 떠도는 상념과 많은 사유와 지친 불면과 혼곤한 잠에서 발아하는 꿈들을 시각화하고 있는 것이다.
박승예_Casque1_종이에 아크릴채색, 펜_150×100cm_2011


아크릴로 칠한 색 면을 부분적으로 만들고 그 위에 볼펜으로 덮어나가 얼굴을 그렸다. 중력의 법칙과 시간의 흐름에 의해 생겨난 물감이 흘러내리는 자취는 내면의 상처를 암시하거나 불안과 불만을 눈물처럼, 피처럼 뚝뚝 흘려놓기도 한다. 이는 볼펜만으로 이루어진 다소 건조한 그림에서 액체성과 유동성을 가시화하고 좀 더 회화적인, 자유로운 그림의 상태를 도모하는 차원에서 연출되는 편이다. 볼펜으로 굴린 선은 가장 원초적인 선이자 낙서나 막연히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한 원초적인 몸짓, 마음의 음성을 연상시킨다. 또한 꼬불거리는 곡선은 직선에 비해 무엇인가를 묻어주고 다른 것과 어우러지는 한편 결코 부담스럽지 않은 선이 되었다. 그리고 틀리지 않은 선이자 그림 그리는 이를 한없이 자유롭게 해주는 선이기도 하다. 박승예의 작업은 볼펜으로 정확한 데생, 드로잉을 하는데 상당히 완성도가 높고 그만큼 정확한 표현이 되고 있으며 일러스트레이션적인 도상화의 힘이 크게 다가온다. 메시지가 선명하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꽉 조여져서 오는 아쉬움이 있다. 그림이 지나치게 선명한 문장 같을 때 그림의 힘과 여운은 반감되는 편이다. 그렇지만 그림을 통해 떠도는 무수한 상념과 자신의 삶에서 유래하는 모든 관심과 불안 등을 집요하게 성찰하고 이를 타인과 소통하기 위한 시각화 작업은 주목된다. 여전히 미술이 언어가 되고 소통이 되며 인간과 삶에 대해 지속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환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박승예_Enforced insight_종이에 아크릴채색, 펜_150×130cm_2011


작가는 뱅글뱅글 돌아가는 선으로 자화상을 그렸다. 그런데 이 자화상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의 반영이 아니라 그로부터 출발해 낯선 존재로 변신해가는 이상한 자화상이다. 동물과 자신의 몸이 하나로 붙어서 이종교배된 형국이다. 마치 반인반수가 되었다. 자신의 얼굴과 그 얼굴이 가리고 있던 괴물 같은 또 다른 얼굴이 그렇게 들러붙었다. 흥미로운 얼굴에 강렬한 눈빛, 마임과도 같은 표현적인 손짓, 여러 동물의 형상이 공통적으로 검출된다. 얼굴이 그려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부분은 그대로 여백으로 놔두어서 마치 그려진 부분, 얼굴이 고립되거나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다소 무섭고 괴이한 얼굴이지만 아주 낯설지는 않다. 인간은 자신의 몸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 또 다른 존재를 꿈꾸는가 하면 자신의 얼굴 안에서 낯선 얼굴, 존재를 보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담보해주는 것이 결코 이 얼굴, 몸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과 괴물의 날카로운 경계도 실은 없고 인간은 동물이자 고상한 인격체이기도 하고 순간 낯선 괴물이었다가 알 수 없는 존재로 부유하고 선회한다. 단일한 그 무엇이라고 명명될 수 없는 것, 거울에 비친 얼굴로만 재현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박승예의 자화상 또한 그런 맥락에서 출몰한다.
박승예_Queeing_종이에 아크릴채색, 펜_150×130cm_2011


작가는 자신의 얼굴이 재미있게 생겼다고 말한다. 재미있는 표정이나 상황을 만든 후 촬영하고 그 사진을 참조로 해서 낯선 괴물 같은 모습으로 변형한다. 작가가 마치 '마임'을 하고 있거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머리는 신체에서 절단되고 분리된 상태다. 그 머리에 손이 붙어있다. 얼굴과 손만으로 이루어진 자화상이다. 타인에 대해 공격적이고 상처를 주는 무기가 되는 그 손의 끝은 붉게 물들었다. 손이 얼굴에 다양하게 붙어나가면서 돼지나 도베르만, 투구 등을 연상시켜준다. 충실하게 길들여진 투견의 공격성, 입이 꿰매진 돼지의 슬픔, 오리 주둥이를 단 얼굴, 3M박스에 묻힌 얼굴, 혜안이 강요되는, 그래서 또 다른 눈을 가진 초상 등이 등장한다. 다람쥐 가면을 쓰고 오른팔이 유난히 길게 늘어져 있는 초상은 거부감을 주지 않는 숨은 얼굴에 평균화되는 오른손잡이의 강요와 그로인해 평균화되는 현대인,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존재를 한없이 무겁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그로인해 괴물이 되어가는 것이라는 불안과 공포를 반영하는 그림이다. (중략) ● 결국 이 그림은 자신의 내면을 보는 작업이다. 인간이 가진 면면의 다면성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특히 존재하는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역설적인 괴물, 공포와 불안의 초상이 근작을 채우고 있다. 작가란 존재는 생각이 많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존재다, 작가란 삶에 투정을 부리고 이런 식의 삶이 아닌 다른 식의 삶에 대해 늘상 지껄이는 자다. 해답이나 정답을 바라지 않고 손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서 속단하지 않으면서 지치지 않는 질문을 던진다. 박승예는 '골방작가'로서 하루 종일 작업실에서 지내며 작업을 한다. 그러나 동시에 모뎀통신세대로서 쇼셜네트워크를 통해 외부의 누군가와 열심히 소식을 전하고 의견을 개진하고 떠드는 것이 더없이 좋다고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행복한 사람,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그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지금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 그 행복을 억압하고 방해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그 생각의 덩어리를 볼펜으로 형상화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볼펜은 사실 쓰기의 도구이다.) 그 내용이 다소 상식적이며 실존적인 틀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생각을 철저하게 밀고나가며 그것의 효과적인 시각화에 몰입하는 진지한 작가를 만나기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 박영택
박승예_Standarded_종이에 아크릴채색, 펜_150×100cm_2011



Apprehension inside of me, apprehensive monster portrait





Mon insomnie 불면증의 밤




이인경展 / LEEINKYUNG / 李仁慶 / photography 2011_0817 ▶ 2011_0831 / 월요일 휴관




이인경_막다른 골목 #1_디지털 프린트_40×60cm_2010



초대일시 / 2011_0820_토요일_06:00pm

기획 / 이목화랑

관람시간 / 화~금 10:00am~06:00pm / 주말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이목화랑 YEEMOCK GALLERY 서울 종로구 가회동 1-71번지 Tel. +82.2.514.8888 www.yeemockgallery.co.kr





불면증의 밤 ●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면서 불면증을 벗어나기 위해 한 노력 중에 한 가지가 바로 사진 찍기이다. 사진기를 들고, 갈 수 있는 곳을 발길 닿는 대로 간다. 어둡고 후미진 곳이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 등등... 그 공간들은 마치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 꿈처럼 희미하게, 뚜렷하지 않게 인식된다. 마치 꿈속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들다. 현실을 구별하기 힘들고, 두렵기까지 한 어둠. 그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빛으로 향한다. 빛을 찾아본다. 인지된 그 빛은 어둠 속에서만 존재할 뿐, 가까이 다가가면 이미 그 곳엔 빛은 사라지고 어둠뿐이다. ● 잠이 오지 않는 어딘가 에서의 하룻밤. 꿈인지 현실인지, 한국인지 외국인지, 어딘지 모를 그곳. 그곳에서 가끔은 뚜렷한 인상의 빛 또는 색을 기억 속에 남기기도 한다. 밤이 새도록 꺼지지 않는 네온은 타의반 자의반 머릿속 어딘가에서 그 불빛을 밝히고 있다. 어둠 속에 갇힌 채 말이다. ● 반복되는 불면증의 밤,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과 두려움이 뒤엉켜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버려지지도 않고 잊혀지지도 않은 채. ■ 이인경

이인경_새벽 1시_디지털 프린트_30×45cm_2010


불면에 대해 ● 인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모두 연약한 존재이다. 인간은 집단생활과 불의 사용을 통해 이 약점들을 보완할 수 있었다. 인간에게 불을 내줌으로써 문명을 열게 해준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는 불이 인간 사회에 가져온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쇠사슬로 묶어 놓고,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고, 밤에는 간이 다시 회복되는 형벌을 가한다. 불을 통해 인간은 밤을 정복할 수 있었고, 만물의 영장이 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신과 비슷한 능력을 갖추게 된 인간에게, 밤은 이제는 공포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휴식의 시간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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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남展 / KIMSUNGNAM / 金成男 / painting 2011_0817 ▶ 2011_0904








김성남_Ubermensch_혼합재료_230×130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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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817_수요일_06:00pm

기획 / 금산갤러리

관람시간 / 10:00am~09:00pm / 토_10:00am~06:00pm / 일_11:00am~06:00pm

금산갤러리 KEUMSAN GALLERY 서울 중구 회현동 2가 87번지 쌍용남산플래티넘 B-103호 Tel. +82.2.3789.6317 www.keumsan.org







I'm Sam ● 영화 『아이엠샘』의 숀 팬의 이름만큼 유명한 Sam이 또 있을까? 현대미술에는 그에 못지않게 유명한 'Sam'이 있다. 바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Sam'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변기 'Sam' 이후 컨템포러리 아트는 화려한 발전을 거듭해 왔고 뒤샹의 '손 보다 중요한 아이디어' 미술이 중심이 되는 미술시장이 도래했다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물론,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제한 없는 상상력으로 구성된 현대미술의 매력은 미술 애호가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신을 다해 '손으로 만들어낸 미술'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일까? 가치에 대한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분명 현대미술시장은 유독 손으로 그림을 그려내는 작가들에게 냉담하다고 느껴진다. 금산갤러리의 『혼신의 작가』 시리즈는 이러한 고민에서 출발한다. 작가의 삶과 혼을 전력투구해 그려내는 작가들을 소개하고 소통하는 자리를 만들고자 함이다.
김성남_Ubermensch_혼합재료_230×130cm_2010
김성남_Ubermensch_혼합재료_230×130cm_2011
김성남_There-01101_캔버스에 유채_130.3×162cm_2011


『혼신의 작가』 시리즈 첫 기획전은 오는 8월 17일 서울 금산갤러리에서 김성남 작가의 개인전으로 시작된다. 윤상진 성곡미술관 큐레이터의 글에 따르면 김성남 작가의 작품은 "그림은 생각해내서는 안 된다."는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작품을 그저 '바라보고' 있게 만드는 힘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 무질서해 보이고 어지러운 '숲'과 끝없는 어두움 속에 자리하고 있는 '초인', 붉은 피로 물든 '제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이성과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현대사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원초적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의 죽음과 공포 그리고 초월의 작품 세계는 어쩌면 그 어떤 설명이나 해석이 필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우리의 내부에 잠재된 의식과 두려움, 원초적 힘에 대한 갈망 그리고 삶과 죽음은 그의 작품이 아닌 우리에게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김성남_There-01102_캔버스에 유채_116.7×91cm_2011
김성남_There-01105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1
김성남_There-01106_캔버스에 유채_150×80cm_2011


그의 손끝을 통해 나타난 하나의 형태는 보는 이로 하여금 보는 이의 기억 속의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의 기억과 감정이 얹힌 캔버스들은 그의 혼과 신의 세계이며 동시에 보는 이 '자신의 세계'이기도 하다. ● 8월 17일에 시작되는 김성남 작가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금산갤러리는 『혼신의 작가』 시리즈를 통해 작가의 혼이 손 끝을 통해 표현되는 작가들을 지속적으로 소개할 것이다. ■ 정희철




My Motherland - 비록 아무 것도 없을 지라도












주명덕展 / JOOMYUNGDUCK / 朱明德 / photography 2011_0818 ▶ 2011_0925 / 월요일 휴관








주명덕_정읍 Jeongeup_198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104e | 주명덕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817_수요일_06:00pm

기자간담회 / 2011_0817_수요일_12:00pm

주최 / 대림미술관 기획 / 박주석 후원 / 대림산업 협찬 / 영창피아노_국립극단

대림미술관 트위터 www.twitter.com/daelim_museum 대림미술관 미투데이 www.me2day.net/prdaelim 대림미술관 페이스북 www.facebook.com/daelimmuseum

관람료 일반 5,000원 / 학생 3,000원 / 미취학 어린이 2,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대림미술관 Daelim Contemporary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통의동 35-1번지 Tel. +82.2.720.0667 www.daelimmuseum.org







2011년 8월 18일-서울 ●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위치한 대림 미술관은 오는 8월 18일부터 9월 25일까지 오늘날 한국사진을 대표하는 작가 주명덕의 작품 세계를 집중 조명하는 『주명덕 사진전 – My Motherland』를 선보인다.
주명덕_강릉 Kangneung_1980


한국 사진사(史)의 산 증인, 거장 주명덕 ● 한국 모더니즘 사진의 대가 주명덕(1940- )은 1966년 첫 개인전 『홀트씨 고아원』으로 한국의 현대적 기록 사진을 시작한 장본인이자, 사진 매체의 순수함을 지켜낸 대표 사진작가이다. 주명덕은 다큐멘터리 형식의 초기작을 거쳐 한국의 공간과 자연으로 시선을 옮겨갔으며, '흑백의 미'로 대변되는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주명덕_경주 Gyeongju_1992


2008 『도시정경』, 2009 『풍경』에 이은 세 번째 사진전 ● 2008년 시작된 대림미술관의 '주명덕 프로젝트'는 일상적 삶의 공간으로서 도시의 이미지를 기록한 첫 번째 전시 『도시정경』, 작가가 40년 간 한국의 산과 대지를 찾아다니며 삶의 터전을 세심하게 포착한 『풍경』에 이어 한국의 전통 공간을 주제로 한 이번 『My Motherland』 사진전을 마지막으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주명덕_부산 busan_1986
주명덕_안동 Andong_1979


『My Motherland』 - 낯설거나 혹은 익숙한 우리 삶의 공간, 그 아름다움과 의미를 발견하다 ● 이번 사진전에서 선보이는 주명덕의 작품은 카메라를 통해 작가가 바라본 '조국'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작가에게 '조국'이란 어머니의 고향이자 아들에게 물려줘야 할 소중한 가치, 동시에 미의식의 원형으로, 이는 고스란히 출품작들에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관객들은 사진전을 통해 거장의 눈으로 바라본 전통적 삶의 공간과 그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근대화의 역사 속에서 크게 변형된 우리 삶의 원형을 발견하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주명덕_순천 Suncheon_1972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박주석 교수는 "『My Motherland』 사진전을 찾는 관객들은 과거 흑백사진 속 이미지에 대한 심미적인 감상에 그치지 않고 '나의 어머니' 혹은 '나의 할머니'의 시선과 감성까지 상상해 보는 의미 있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며 "젊은 세대에게는 사진 속에 담긴 과거의 공간을 현재의 그것과 비교해 보는 기회가, 기성세대에게는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익숙한 삶의 공간을 추억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 대림미술관
주명덕_경주 Gyeongju_1972







전시연계 프로그램






예술가 그리고 공간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11_The 14th Seoul Fringe Festival   2011_0811 ▶ 2011_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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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서울 홍대앞 창작공간 및 거리일대와 도심 곳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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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를 응원하는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이 만난 열 번째 홍대앞!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은 1년에 한 번, 홍대앞에서 펼쳐지는 대규모 독립예술축제이다. 홍대앞 인디문화를 응원하고 홍대앞에서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소비와 유흥에 의해 빠르게 상업화되는 홍대앞을 지키면서, 새로운 문화예술 형성에 기여하는 축제로 성장해오고 있다. 14회를 맞이한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11이 도심을 뜨겁게 달군다. 올해에는 8월 11일 (목) 부터 27일 (토) 까지, 총 17일간 서울 홍대앞 창작공간 및 거리일대와 도심 곳곳에서 진행한다. 250 여 개인 및 단체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연극, 음악, 무용, 퍼포먼스, 마임, 다원예술, 미술, 복합장르와 같은 작품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 2011 테마 : 예술가 그리고 공간 ● 예술가들이 모여 창작공간을 이루고, 새로운 문화예술이 태어난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이 14년이나 축제를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꿋꿋이 창작활동을 해나가는 수많은 예술가와 인디문화를 지켜 온 '홍대앞'이란 공간 덕분이다. 그렇기에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11에서는 '예술가 그리고 공간'을 테마로, 예술가 지원 강화, 효율적인 공간운영, 그리고 축제로 응축되는 독립예술의 현 주소를 집중 조명한다. ●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의 2대부문예술제는 실내공연예술제와 야외거리예술제로 이뤄져 있다. 두 예술제는 예술가의 자유참가로 진행한다. 실내공연예술제는 연극, 무용, 마임, 음악, 전통예술, 다원예술, 인형극과 같은 작품들을 실내공간에서 선보이는 예술제이다. 2011년에는 160여 팀이 200여 회에 걸쳐 공연한다. 야외거리예술제는 거리에서 표현 가능한 모든 예술을 만나는 예술제이다 홍대앞 걷고 싶은 거리를 중심으로, 예술가가 발굴한 이색 야외공간에서 인디음악, 무용, 시각예술, 현대무용, 인터렉티브 아트와 같은 작품들을 골목 구석구석에서 만날 수 있다. ● 우선 참여 예술가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 주력하였다. 그룹인터뷰와 축제 기간에 열리는 주(weekly,酒)파티를 통해 교류의 장을 넓혀 메소드를 나누고, 더욱 다양한 창작활동으로 확장시킨다. 또한 리뷰, 비평모임과 같은 깊이 있는 피드백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예술가 성장과 작품 발전에 기여하고자 한다. ● 축제를 만드는 과정도 더욱 견고해졌다. 실내공연예술제 경우, 축제 참가비를 신설하여 참가자의 책임감을 높이고 홍보물 제작, 프로그램 운영 등으로 사용하여 혜택을 나눈다. 또한 기부 활성화프로젝트를 도입하여 기부자가 공공의 축제임을 인식하고 함께 만드는 주체로서 자부심을 갖게 하는 축제 모금 캠페인을 진행한다. ● 또한 국내에 초점을 맞추어 다양한 형태로 독립예술 활성화를 도모한다. 국내 독립예술축제들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독립예술 집담회', 해외 거리예술 연구조사 발표인 '거리예술포럼'(프랑스 샬롱 거리예술축제 탐방)과 같은 학술행사, 우리나라 독립예술에 힘을 불어넣는 캠페인과 포럼, 기록영화워크숍 등을 통해 보다 폭넓은 독립예술 담론을 형성한다. ● 마지막으로 2001년부터 10년째 축제를 벌여 온 공간인 '홍대앞'을 덜 훼손시키고 자원을 아끼고자, 아름다운가게 아.지.매와 단원들과 함께 친환경 축제운영을 목표로 연구하고 실천하는 '에코프린지프로젝트'를 가동한다. ■ 서울프린지네트워크




250여 팀 예술가와 46곳 실내외 공간이 자유로이 어우러집니다. 실내공연예술제 : 연극, 무용, 마임, 음악과 같은 작품들을 실내공간에서 선보이는 예술제 티켓가격 : 5,000원 / 10,000원 / 15,000원 / 20,000원(일부 무료) 야외거리예술제 : 거리에서 표현 가능한 모든 예술을 만나는 예술제(무료)

축제와 독립예술을 응원하는 프로그램들로 풍성합니다. □ 기획 프로그램 : 축제 활성 프로그램 오프닝 퍼레이드 8월 11일 금요일 06:30~08:00pm_홍대앞 거리일대 달려라 프린지 : 배달공연 에코프린지프로젝트(협력_아름다운가게 / 아.지.매) 기부활성화 프로젝트(협력_도움과 나눔) 프린지 on Air 라디오 방송 '두근두근프린지'(협력_마포FM)

잠깐! 프린지를 후원하는 손 쉬운 방법! 여러분의 잠자고 있는 '콩'을 깨워주세요!(해피로그 링크)

스페셜 프로그램 : 독립예술 활성 프로그램 포스트프린지(Post Fringe) : 프로젝트 빅보이 3rd, 거리예술작품공모 3RD 예술로 '독립'을 말하다 1 : 독립포럼, 긴말 않겠습니다! 예술로 '독립'을 말하다 2 : 독립기록영화워크숍(협력_미디액트) 지속가능한 예술 활동 캠페인 : 책 보다, 책(협력_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독립예술 집담회(협력_피지컬씨어터페스티벌, 변방연극제) 거리예술포럼(협력_한국거리예술센터) 독립예술리뷰 : 데일리 리뷰 / 거리예술응원단(협력_독립예술 웹진 인디언밥) 주(weekly, 酒 파티) : 참여 아티스트를 위한 네트워크 파티 창작워크숍

축제를 더 가까이서 즐기세요! 프린지클럽 @ 서교예술실험센터 8. 15 오픈 11:00~26:00 인포메이션 부스 @ 관광안내소 앞 11:00~21:00 온라인채널 홈페이지 : www.seoulfringefestival.net 블로그 : blog.naver.com/hellofringe 해피로그 : happylog.naver.com/seoulfringe 트위터 : @ seoulfringe 페이스북 : www.facebook.com/seoulfringefestival 유트브 : www.youtube.com/seoulfringe

서울프린지네트워크 Seoul Fringe Network 서울 마포구 합정동 412-31번지 3,4층 Tel. +82.2.325.8150 www.seoulfringefestiv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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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ariation






이길우_손원영展   2011_0819 ▶ 2011_0917 / 일요일 휴관






이길우_무희자연_순지에 인두, 채색, 장지에 담채, 배접, 코팅_120×95cm_2010





초대일시 / 2011_0819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포월스 GALLERY 4WALLS 서울 강남구 논현동 248-7번지 임피리얼팰리스 호텔 1층 Tel. +82.2.545.8571 www.gallery4walls.com








2011년 8월 19일부터 9월 17일까지 논현동 임피리얼 팰리스호텔 1층에 위치하고 있는 '갤러리포월스'에서 한국화가 '이길우'와 서양화가 '손원영'의 2인전 『The Variation』展을 개최한다. 『The Variation』展(변주곡)은 '원곡의 주제 선율을 유지하며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음악인 동시에 통일성 속에 다양성을 구현해내는 가장 이상적인 음악이라' 설명하고 있다. 한국화가 '이길우'와 서양화가 '손원영'은 그 '변주곡'처럼 정통회화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새로운 시도를 통해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아이덴티티를 구현하고 있어 이번 전시는 두 작가가 이야기하는 동?서양화의 미학과 독특한 재료와 기법을 주제로 한 새로운 미술을 만나볼 수 있다. ■ 갤러리 포월스

이길우_무희자연_순지에 인두, 채색, 장지에 채색, 배접, 코팅_170×135cm_2010
이길우_동문서답 _순지에 인두, 채색, 장지에 채색, 배접, 코팅_120×95cm_2008
이길우_동문서답-流,遊_장지에인두,채색,배접,코팅_180×130cm_2007


이길우 ● 순지에 불이 붙은 향을 가까이 대어 엷은 종이를 태우는 순간은 결코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시간의 지속이다. 그 짧은 시간에 시선을 집중하고 원하는 만큼의 크기와 모양이 나오도록 주목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우연이 개입한다. 종이가 얼마만큼의 구멍의 크기로 태워지는지, 또 모양이 어떨지는 예측이 가능하긴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밑그림이 그려진 순지에 향불을 댈 때 전체적인 작품의 윤곽을 떠올리면서, 다시 말하자면 완성된 그림을 끊임없이 연상하면서 구멍을 내가는 것이다. 이길우 의 작업은 이처럼 우연과 계획의 소산이다. 그의 작품이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상을 묘사한 사실적 화풍의 회화란 점에서 계획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 이길우 의 작업에서 향불로 종이를 태우는 행위는 일종의 퍼포먼스다. 그는 제의에서 정화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분향의 의식처럼 끈기 있는 인내심으로 이 행위를 수행한다. 작업실은 구멍의 숫자가 늘어가는 것에 비례하여 향내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독특한 냄새를 발산하는 향은 사람의 마음을 성스럽게 만든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길우 는 화면에 그려진 대상의 윤곽선을 따라 순지를 태워나간다. 풍경을 비롯하여 인간들의 일상적 동작이나 인물의 얼굴 모습에 이르기까지그가 그려내는, 아니 만들어내는 대상들은 이 수행과도 같은 행위의 결과물이다. 여기서 그의 작업을 가리켜 굳이 '수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작업이 끊임없는 동작의 반복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엷은 순지에 뜨거운 향을 대서 구멍을 내는 이 단순한 동작이야말로 스님들의 선 수행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중략) ■ 윤진섭
손원영_Relations_캔버스에 아크릴, 과슈 채색_145.5×112.3cm_2010
손원영_Relations_캔버스에 아크릴, 과슈 채색_130.3×162.1cm_2010
손원영_Relations_캔버스에 아크릴, 과슈 채색_72.8×91.9cm_2010
손원영_Relations_캔버스에 아크릴, 과슈 채색_110×50cm_2010


손원영 ● 미술사를 차용한 손원영의 근작을 보면 단순한 패러디의 경우를 넘어서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인상파 화가들은 하나의 이미지가 사실은 이질적인 색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림을 가까이서 보면 터치들이 중첩된 무의미한 얼룩처럼 보이지만, 일정한 거리를 갖고 보면 색점들이 서로 어우러져 비로소 하나의 상으로서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부분들(터치와 색점들)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는 이러한 인식은 이후 기계복제 시대의 망점과 전자복제 시대의 광점, 그리고 디지털 매체에 의해 지지되는 가상현실시대의 픽셀 이미지에로 연이어지고 변주된다. 결국 작가가 미술사 중에서도 특히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차용한 이면에는 그로부터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찾아가는 퍼즐작업의 사실상의 뿌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로써 손원영의 근작에는 현대미술과 관련한 진정한 회화성 혹은 그 근원으로 부를 만한 현상과 대면하고 그 성과를 자기화하려는 자의식이 반영돼 있다. 이를 통해 미술사를 사용하는 다른 방식, 다른 가능성의 지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중략) ■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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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dinary People




박정혁展 / PARKJUNGYUK / painting 2011_0820 ▶ 2011_0930 / 일,공휴일 휴관




박정혁_Park's Park9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93cm_2009



초대일시 / 2011_0820_토요일_06:00pm

후원/협찬/주최/기획 / Gallery Absinthe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_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갤러리 압생트 gallery absinthe 서울 강남구 신사동 630-21 B1 Tel. +82.2.548.7662~3 www.galleryabsinthe.com




부작위(不作爲)의 묵종(默從), 그리고 이에 대한 항거자 '어제의 확신을 오늘 등져버린 자만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이다.' (말레비치)1 '포르노그래피는 육체에 대한 정신의 투쟁 형식이다. 그 형식은 고로 무신론에 의해 결정된다. 왜냐하면 육체를 창조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육체의 과잉을 침묵으로 환원시키는 정신 속에 거주하는 과잉 언어가 더 이상 존속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피에르 클로소프스키)2 ● Ⅰ. 2차 세계대전 당시 신학자이자 루터파 목사였던 마르틴 니멜러(Martin Niemöller)는 최초에 나치에 대한 보수적 방관자였다. 처음에는 히틀러에 침묵으로써 부역했던 그가 종국에 히틀러에 항거했던 이유는 히틀러의 교회에 대한 탄압 때문이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침묵으로 말미암아 희생되었던 수많은 영혼 앞에서 깊이 뉘우쳤다고 한다. 니멜러의 고백을 들여다 보자.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습격했을 때, 나는 다소 불안해졌다. 그렇지만 결국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어 나치는 사회주의를 공격했다. 나의 불안은 조금 더 커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어 학교가, 신문이, 유대인이, 이런 식으로 잇달아 공격대상으로 늘어났으며, 그때마다 나의 불안은 커졌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어 나치는 교회를 공격했다. 그런데 나는 그야말로 교회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를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3 나치의 행위는 세상을 지배하는 세태의 한가지 유형일 뿐이다. 나는 나치의 악행을 말하려 함이 아니다. 옳고 그름과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을 떠나서 세상은 움직인다는 점을 말하려고 한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의 실체를 가리켜 세태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세상은 움직인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현실을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의미를 갖는다. 이를 정치학에서 '부작위의 묵종' 이라고 부른다. 이 부작위의 묵종은 현실에서 너무나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보이지 않는, 그러면서도 너무나 무서운, 세태유지의 조력자이다. 그러나 이 부작위의 묵종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분야가 현실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예술이 거의 유일하다. 왜냐하면 예술은 그 존재근거상 기존의 시각적 원칙과 예술계 암약에 항거하여 세운 자신의 새로운 시각적 원칙과 질서를 새로이 평가 받으려는, 인생을 건, 장기적 기획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껏 집적된 모든 시각적 예시의 역사를 연구해야만 하며, 살며시 변화해가는 세태라는 괴물에 대해서 해석해야 한다. 동시에 보는 이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을 투영시킬 수 있는 심미적 기제(aesthetic mechanism)를 구현시켜야만 한다. 따라서 예술가에게는 역사, 정치경제, 사회, 생태계, 공동체, 우주, 성, 인종, 미래가 모두 주제의식이 된다. 그렇지 않고 기존의 시스템과 형식을 안일하게 따르려는 예술가가 있다면 그에게 '비평적 저항주의'나 '시각적 사유자'라는 레이블은 절대로 붙을 수가 없다. 다만 보수적 상업주의의 성과는 어느 정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장황한 이야기를 모두에 꺼낸 것은 박정혁의 예술 이력을 살피는데 좋은 참고 귀감이되기 때문이다. 박정혁이 일차적으로 타파하려는 대상은 '부작위의 묵종'이다. 사람들이 갖는 수동적 편향성은 지배층 기획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을 배태시킨다. 이 무비판적 세상 따라가기가 또다시 소통 없는 일방적 허무의 욕망을 생산한다. 박정혁에따르면이'욕망이라는 희극적 미끼야말로 절대다수를 지배하는 원천적 힘'이라는 것이다. 진정 박정혁이 세상에 이름을 알린계기는 2004년 광주 비엔날레 전시장을 어지럽혔던 'KMDC 프로젝트'의 현기증이었을 것이다. 성격이 이상하거나 볼품 없이 병약하고 나이든 유기견들을 콘테스트 형식으로 순위라는 상을 수여했다. 이 유기견과 콘테스트의 유비관계는 인간사 모든 현상으로 확산될 수 있다. 예컨대, 예술가와 비엔날레, 아니면 정치가와 대선이 대표적일 것이다. 세간의 희화화를 통해 혹닉(惑溺)을 타파시키려던 박정혁의 기도들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예상불허의 다양한 형식으로 번져나갔다. 특히나 빛났던 자기실존의 발현은 두말할 것 없이 2004년도 작품 '166cm'이다. 작가가 서른 즈음에 맞이했던 친조모의 마지막 죽음과의 사투를 채록한 영상이다. 회광반조(回光返照)의 불빛이랄까. 삶의 마지막을 앞둔 조모의 비명은 거셌다. 박정혁의 세간의 희화화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뼈를 깎는 고통임을 이 작품 하나가 전부 대변한다. 죽어가는 조모는 사람들의 최대가치를 상징한다. 절대적으로 객관화될 수 없는 바로 가족애 그것이다. 희로애락의 삶의 역정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을 감정의 여운을 절치부심 객관화시켰던 이유는 가족이라는 혹닉을 타파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가치편향, 이치관념에 대한 투쟁선언이었다.
박정혁_Ordinary People_상호연동된 5채널 비디오_가변설치_2011


Ⅱ. 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Henrik Johan Ibsen)의 연극 '페르귄트(Peer Gynt)'에는 '늑대떼가 밖에서 미친 듯이 부르짖을 때 가장 안전한 방법은 그들을 따라 나도 울부짖는 것이다'는 대사가 나온다. 박정혁은 다르다. 늑대떼가 밖에서 울부짖을 때 박정혁은차라리그들을향해총을겨누거나돌멩이를투척한다. 그의 투척 대상은 기존의 예술방법을 향한 것이다. 주지와 같이 1989년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한국의 엘리트주의 미술과 민중미술의 이치적(二値的) 대립이 사라졌다. 이 두 기단이 충돌 후 사망함으로써 많은 강우를 유발시켰는데 그것은 서구 정보의 대량유입, 포스트 마르크스 대안 찾기로서의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 적극 수입, 외국 유학파의 유입으로 인한 서구형식의 무비판적 확산 등으로 압축 설명할 수 있다. 동유럽 사회주의에 대한 서유럽 자유주의의 승리는 진보적 지식인이나 비평주의적 예술가들로 하여금 신념보다는 실리, 삶의 진지함보다는 시스템으로의 타협을 종용했다. 사회를 성격적으로 규정했을 때 강박, 신경질, 데카당스, 댄디즘, 패셔니스트, 이국주의가 만연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TV, 영화, 비디오, 만화, 인터넷과 외국도서를 통한 전대미문의 이미지의 범람, 그리고 검열의 약화를 통한 불법적 이미지의 공유 또한 90년대 처음 일어난 일이다. 이 어지러운 혼란 속에서 박정혁의 정신이 배태되었다. 90년대 미술가들은 서구 따라 하기에 열을 올렸다. 매체의 무한수용, 게다가 서구의 모작이 홍수를 이뤘다. 이 모작들은 해외 유학파의 손길을 따라 전시장에 유포되었고 진정성의 기준도 사실 애매했다. 특히 한국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진수로 둔갑하면서 입국한 전시는 1994년도 '휘트니비엔날레 인 서울'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때 소개된 로버트 롱고, 데이비드 살르, 에릭 피슬, 줄리앙 슈나벨처럼 특수한 방법론의 스타일을 자기 브랜드화해서 상업적 레이블을 굳건히 강화시켜가는 보수적 상업주의 작가들의 모습이 만연했다. 박정혁은민중미술의패퇴로괴로워하는의식적선배들과매체주의에서새로운출구를찾았던신진동료들사이에서무수한갈등을느낀인물이다. 동시에 위에서 본 것처럼 전혀 감흥 없었던 낯선 상업적 현상들이 자신들이야말로 주류이자 대세라는 명분으로 때로는 압박했고 때로는 유혹한 것이다. 박정혁은어지러운이모든정황으로부터잠시벗어나제로베이스를찾았다. 세상을 향한 예술의 당위성이 무엇인가를 묻거나 예술을 끝없이 지속시켰던 역사의 내적 필연성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자기 질문에 스스로 답하려 했다. 박정혁의 대답은 비교적 장기간이 흐른 지금에서도 완성된 것은 아니겠지만 그 과정의 진지함만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박정혁이 가장 아파하는 현실은 '부작위의 묵종'과 비슷한 말이다. 그것은 피터 브뤼겔의 '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그림' 속의 상황이며 절벽을 만나면 떨어져 절멸하고 마는 양떼들의 습성과도 같다. 박정혁은 "인간이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념을 세워야하며 카테고리를 구분하고 가치편중화를 어쩔 수 없이 묵인해야만 하는 제한적 존재"라고 말한다. A를 이해하기 위해 B를 곡해해야만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일례로 '부정교합(malocclusion)'은 윗니와 아랫니가 맞물리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말이지만 한국에서 21세기에서나 유행하기 시작했다. 세간 모처의 상술이 상식으로 자리 잡아 모든 이의 무의식을 지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요즘의 이 상식대로라면 윗니가 돌출된 사람은 비정상(abnormal)이며 위아래가 딱 맞물려야만 정상(normal)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부정교합이라는 개념을 들어 정상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카테고리를 나눌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다. 박정혁이 유명하게 만든 단어는 또 있다. 식물의 어떤 기관이 위치 이상을 보였을 때 지칭하는 '도립(倒立, resupination)'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 도립이라는 현상이 진정으로 식물의 생장이나 꽃의 만개를 저해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식물학자의 개념일 뿐이다. 박정혁은어지러운상황속에서예술가가반드시지켜야할최소한의의무사항을인간이지니는개념과편견에내재된폭력성을드러내려는의지에서찾은것이다. 그것은 박정혁을여타다른예술가와구별해주는작지만위대한작위(作爲)의 실천이었다. 앞서 말한 신학자 니멜러는 마지막 참회를 통해 사상의 은인이자 반전 행동주의자로 거듭났다. 니멜러는 자신의 묵인과 방관이 부른 대참사를 통렬히 아파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얻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처음에 저항하라(Principiis obsta)'이며 두 번째는 '결말을 생각하라(Finem respice)'는 원칙이다. 박정혁의예술이력은니멜러의원칙과아주잘부합한다. 처음에 늑대떼에 돌멩이를 던지며 '저항했다.' 즉 제도권의 미술에 합류되는 자신을 부정했다. 끝내 오갈 곳 없이 외로워졌다. 그러나 무언가를 했다는 자신감만은 있었다. 이 자신감은 박정혁으로 하여금 '최종 결말을 생각하게 만드는 원천이 되었다.' 이는 바로 2008년도의 이야기다. 그리고 박정혁이 가장되고 싶은 결말은 세대를 대표하는 페인터였음을 깨닫게된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세대의 허무와 공포를 알려야 했다. 적어도 우리 한국 사회에서 철저한 상업적 자본주의로부터 내면화되기 시작한 첫 번째 세대가 있다면 1970년대 태어난 박정혁의 세대임이 분명하다. 그 내면화의 방법론은 반복적 어휘나 학습의 세뇌가 아니었다. 스피디하며 도발적이되 문명의 색깔을 머금은 이미지의 남용으로 내면화된 것이다. 자기 세대의 허무와 공포를 철저히 알리는 회화 연작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포르노그래피, 종교적 도상, 무의식을 좀먹는 부정교합이라는 개념적 폭력성, 상품 이미지, 성적인 냄새가 나는 체벌 이미지, 동물적 활력, 뜨거운 불길의 이미지 등 온갖 데카당스가 뒤섞여 있다. 중심과 주변이나 주인공과 조연이 따로 없다. 거대한 소비 메커니즘으로 인해서 공룡이 멸종한 것처럼 또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이스터 섬의 비극처럼 절멸(絶滅, catastrophe)에는 상하와 좌우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인간을 절멸로 이끌 소비 메커니즘의 기마첨병(騎馬尖兵)이 바로 박정혁이 사용하는 이미지들이다. 이러한 박정혁의 회화 의미, 나아가 예술의 자기 목적은 '보통 사람들(ordinary people)'이라는 제목의 야심 찬 신작 영상에서 종합된다. 총 5개의 영상이 동시다발적으로 상영되는데 50여 편의 동서양의 영화와 드라마를 짜깁기해서 극화시킨 작품이다. 일종의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기법인 이 작품은 5편의 작품이 각각 인간 감정의 삼라만상을 드러낸다. 그러다 특정 영상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순간이 있다. 절정의 순간, 어떤 영상은 목청으로 분노를 포효하는가 하면 어떤 영상은 총사를 난발하기도 한다. 또 개가 울부짖기도 한다. 하나의 화면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나머지 네 개의 화면은 미장센으로 돌변하여 백기를 든다.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는 절정의 극화된 순간을 위해서 모든 것이 봉사되는 구조를 갖는다. 바로 박정혁의 설명이다. 목구멍에서 괴성을 포효하건 총부리에서 화염이 난사되건 눈가에서 눈물이 그침 없이 흐르던 간에 감정의 발산에 대해서만큼은 우리가 저지할 수도 없고 방해해서도 안 되는 감정의 원형(Urtypus)이다. 누구나 이러한 원형질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인간이다. 상대를 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발산하려고 하고 사정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구를 억누르는 문화에서 통제하는 문화로 이행하더니 급기야 그것을 왜곡하고 변질시켜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남용의 시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우리는 박정혁의 유례없이 플라스틱 냄새물씬하면서 스피디한 붓질과 상하좌우는 물론 중심과 종속마저 따로없는 회화구성의 진정한 의미를 읽어내야만 한다. 임계점에 이르렀을 때 인간이 내리는 최종처분은 복수라는 이름의 응징임을 끝끝내 읽어내야 한다. ■ 이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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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의 여정 Lines of Flight




박이소展 / BAHCYISO / 朴異素 / drawing 2011_0820 ▶ 2011_1023 / 월요일, 추석 당일 휴관




박이소_Three Star Show_혼합재료_96×127cm_1994



초대일시 / 2011_0819_금요일_06:00pm

기획 / 김선정(samuso:)_김장언 주최 / 아트선재센터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료 / 성인_3,000원/ 학생_1,500원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추석 당일 휴관

아트선재센터 ARTSONJE CENTER 서울 종로구 감고당길 43(소격동 144-2번지) Tel. +82.2.733.8945 www.artsonje.org




아트선재센터는 작고 작가인 박이소의 예술세계를 드로잉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박이소-개념의 여정 Yiso Bahc – Lines of Flight』전을 개최한다. 개념미술가이자 설치작가로 알려져 있는 박이소는 자신의 관념과 태도를 끊임없이 노트와 드로잉으로 기록했으며, 작품을 전개하는 미디어로서 드로잉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에게 있어 드로잉은 자신의 개념적 태도를 구체화하고 발전시키는 또 다른 도구이자 창작영역이었다. 이번 전시는 박이소의 작업세계를 그의 드로잉과 드로잉적인 초기 회화 2백40여 점을 통해 살펴보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박이소_"오늘"을 위한 드로잉(요코하마) Drawing for "Today" (Yokohama)_ 종이에 연필, 색연필_21×30cm_2001


박이소의 작가로서의 경력은 1982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1994년까지 '박모'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전기와 다시 서울로 돌아와 '박이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가 뉴욕이라는 다문화 사회 속에서 아시아계 이민자 작가로서의 정체성, 예술과 사회, 그리고 창작에 대한 치열한 연구의 과정이었다면, 후기에는 이러한 전기의 태도가 보다 성찰적으로 발현되어 삶과 세계, 보편적 가치를 탐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적 분류는 단순한 구분일 뿐, 박이소의 창조적 태도는 시종일관 자아와 예술, 삶, 그리고 세계에 대한 보편적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비선형적 여정이었다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창작의 여정에서 드로잉은 작가로서 자신을 성찰하고 작업에 대한 개념을 구체화시키며, 세계와 소통하는 가장 근원적인 자신만의 영역이었다. 『박이소-개념의 여정』전은 전문연구원을 선정하여 박이소의 드로잉 전작을 정리하고 작가가 남긴 자료들을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작가의 아이디어에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박이소_"우리는 행복해요"를 위한 드로잉 Drawing for "We are Happy"_ 종이에 연필, 색연필_21×30cm_2004


박이소의 작품세계는 어떤 차원에서 매우 드로잉적이다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의 작품세계가 정주적이고 물질적이라기보다는 임시적이고 가변적이며 동사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작품 세계의 본질과 사유의 흐름이 가장 구체적인 흔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박이소의 드로잉이다. 박이소의 드로잉은 크게, 일반적 의미의 '드로잉(Drawing)', '개념 드로잉(Drawing Concept)', '설치 포트폴리오(Installation portfolio)'로 구분될 수 있다. '드로잉(Drawing)'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표현적이고 선언적인 (한편으로 확장된 회화라고 말할 수도 있는) 드로잉 그 자체이며, '개념 드로잉(Drawing Concept)'은 작업의 개념적 측면을 구체적으로 표상하는 드로잉을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설치 포트폴리오(Installation portfolio)'는 작품 제작과 설치를 위해 상황에 맞게 그가 반복적으로 수정한 설치를 위한 드로잉이다. 작가는 동일한 개념 드로잉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설치되는 조건과 상황에 따라서 그것을 미묘하게 수정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통해 그의 작업을 드로잉이라는 형식으로 다시금 완성시켜 나갔다.
박이소_무제 Untitled_종이에 연필_30×21cm_2000
박이소_무제 Untitled_종이에 색연필, 연필, 마커_35×25cm_2001


이처럼, 박이소에게 드로잉은 미술의 조형적 기초를 훈련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표현방법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고를 선언적으로 드러내는 회화적 방법론의 하나이자 아이디어를 개념적으로 구조화하기 위한 창조적 연구의 한 과정이었다. 전시는 드로잉의 형식적인 차원이 아닌, 작가의 작품 세계에 드러나는 주요 키워드를 설정함으로써 그의 드로잉을 개념적으로 재맥락화한다. 2층의 전시장에서는 드로잉과 드로잉적인 초기 회화를 통해 정체성(identity)과 자아(ego),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사회 정치적 이슈들을 선보이며, 3층 전시장에서는 긍정, 만남과 소통, 그리고 새로운 이상향에 대한 성찰을 개념 드로잉과 설치 포트폴리오를 중심으로 보여줄 것이다. 전시의 흐름은 그가 참여했던 전시에서 제안되고 제작 설치되었던 작품들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그의 전 작품 세계를 조망할 수 있도록 구성된다. 이와 함께, 1층 라운지에서는 박이소 작업 세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21권의 작가 노트 사본, 박이소의 현대미술 및 드로잉에 대한 교육학(pedagogy) 자료, 작품 제작 및 설치관련 자료, 박이소가 녹음한 「Endless Jazz 컬렉션」중 일부와 그가 노래한 「정직성(honesty)」 작가의 육필 원고 및 번역서, 박이소의 친구들이 작성한 박이소에 대한 기억들(서면 인터뷰)이 비치된다. 일명 '박이소와 함께 하는 라운지'로 변화되는 1층 라운지에서 관람객들은 한 작가의 삶과 예술의 여정을 구체적인 사료와 자료로서 경험하고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
박이소_"무제(헬리콥터)"를 위한 드로잉 Drawing for "Untitled (Helicopter)"_ 종이에 연필_21×30cm_2000


박이소는 1985년 뉴욕에서 대안공간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를 설립하여 1989년까지 관장으로 활동했으며, SADI 드로잉 컨셉트 학과교수(1995-1999), 계원디자인예술대학 및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강사(2000-2003) 등을 역임했다. 1994년 하바나비엔날레, 1997년 광주비엔날레, 2001년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2003년과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으며, 미국연방예술기금(NEA) 회화상(1991),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2002),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올해의 예술상(2006) 등을 수상한 바 있다. 2004년 4월 26일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박이소의 사후 7주기를 추모하며, 그의 작업 세계를 다시금 되돌아 보기 위해 기획된 이번 전시는 2014년 사후 10주기 전시로 이어질 예정이다. ■ 아트선재센터



아트선재센터 교육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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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6기 입주작가 모집




접수기간 / 2011_0905 ▶ 2011_0909







접수마감 / 2011_0909_금요일_06:00pm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NANJI ART STUDIO 서울 마포구 하늘공원로 108-1 Tel. +82.2.308.1071 nanjistudio.seoul.go.kr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젊고 유망한 신진 작가들에게 작업 공간과 프로그램을 지원하여 창작활동을 활발하게 함으로써 한국 미술계 발전에 기여하고 세계화 시대에 경쟁력 있는 미술인 육성을 위해 다음과 같이 6기 작가를 공개 모집합니다. ■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6기 입주작가 모집

1.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개요 ○ 장      소 :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 지원사항 : 개인전용스튜디오 1실 및 레지던시 프로그램

2. 모집 부문 및 인원 ○ 입주기간 : 2011. 11. 1~2012. 10. 31 (1년) ○ 모집분야 : 순수시각예술 전 분야 ○ 모집인원 : 26 명

3. 지원자격 ○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자로서 모집공고일 기준 만 40세 이하의 국내외 거주 미술작가로 전용스튜디오를 사용하고 있지 않는 자

4. 선정심사 ○ 선정방법 : 입주작가 선정 심사위원회에서 결정 ○ 절      차 : 1차 서류심사 → 2차 면접심사 → 최종발표 * 2차 심사일과 최종 발표일은 추후 공지 및 개별 연락

5. 제출서류 ○ 입주신청서 - 온라인 신청 양식 ○ 작가 경력 및 작품설명, 활동계획서 - 첨부양식 사용 ○ 작품자료 - 이미지(작품캡션포함) 10매 이내 혹은 동영상 3분 이내 (용량: 10M이하)

6. 모집공고 ○ 서울시 홈페이지(www.seoul.go.kr) ○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seoulmoa.org) ○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홈페이지(nanjistudio.seoul.go.kr)

7. 입주신청서접수 ○ 접수기간 : 2011. 9. 5(월)~9. 9(금) 18:00 마감 * 온라인 입주신청 nanjistudio.seoul.go.kr * 제출양식 및 입주신청방법 -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문의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프로그램매니저 박순영(☎ 02-308-1071)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과 (☎ 02-2124-8941)


 


Thinking of SARUBIA




사루비아기금마련展   2011_0822 ▶ 2011_0831







초대일시 / 2011_0824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곽남신_김범_김성수_김윤수_김을 김인겸_김정욱_김주현_김지원_김태헌 김형관_노충현_도윤희_문성식_박기원 박미현_박소영_박원주_배영환_서혜영 설원기_손동현_안규철_안두진_안창홍 양대원_오경환_유현미_유현민_윤동구 이순주_이영희_이은실_이호인_임국 전수천_정보영_정서영_정수진_정승운 정재호_정주영_정지현_지니서_차명희 채우승_천대광_최병소_최상아_함명수 함연주_함진_허윤희_황은정

기획 /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후원 / 가나아트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 컨템포러리_가나아트센터 미루 GANA CONTEMPORARY_GANAART CENTER MIRU 서울 종로구 평창동 98번지 Tel. +82.2.720.1020 www.ganaart.com




1999년 설립된 사루비아는 전시 후원 프로그램을 통해 작가들의 작업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창작의 기회를 제공해 왔습니다. 십여 년에 걸친 노력의 결과는 한국미술에 대안적인 전시문화를 구축하고 미술계의 지형을 다변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이번 기금마련전시를 통해 조성된 기금은 대안을 모색해 온 사루비아의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또한 비영리 대안공간과 상업갤러리가 서로 협력하며 공생할 수 있는 모범적 사례를 미술계에 제시하고자 한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인기 작가들의 작품과 미술계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작업, 실험적 성향이 돋보이는 작가들의 작업이 다양하게 전시됨으로써 사루비아 기금마련전시는 미술애호가들의 관심분야와 작품 컬렉션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소개 ● Project Space 사루비아다방은 예술의 다양한 분야, 즉 미술을 중심으로 건축, 음악, 무용, 필름 등을 포괄하는 실험적인 예술을 지원하는 비영리갤러리이다. 사루비아다방은 나이와 경력, 작업경향에 구분을 두지 않고 독창적 사고와 실험 정신에 바탕을 둔 예술가를 선정하여 기획한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 왔다. 1999년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문화계 내의 명소, (구)사루비아다방을 인수하여 설립되었다. 1999년 한국의 대안공간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사루비아다방은 한국 현대미술계 내의 대안적 기능을 수행하고 그 대안의 방향을 선도적으로 제시하고 모색하는 역할을 해왔다. 12년 동안 50여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전시를 후원해 왔고, 그 동안의 성과에 힘입어 한국미술계를 대표하는 대안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비영리로 운영되고 있는 사루비아다방은 자산과 기금운용의 투명성을 확보하고자 2006년 (사)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를 설립하였으며, 그 동안의 성과에 힘입어 2007년 서울시로부터 문화예술진흥법에 의한 전문예술법인으로 지정되었다. 2011년 창성동으로 전시장을 이전하였다. ■ 사루비아다방




2011 NANJI ART SHOW Ⅶ




백년몽원(百年夢源) WONDERPIA(WONDER+HETEROPIAS)展   2011_0822 ▶ 2011_0904




강승희_I've got a feeling we're not in wonderland anymore Hand_embroidered on the fabric with mixed material



초대일시 / 2011_0822_월요일_05:00am

참여작가 Gorka Mohamed(SP)_Joep Overtoom(NL)_Jorg Obergfell(GER) Yo Okada(JAP_UK)_Wil Bolton(UK)_Robb Jamieson(CA)_Baldur Burwitz(GER) 강승희_권순관_문명기_박은영_안두진_오윤석_유비호_유승호_이상용 이원호_이창훈_장석준_장종완_장재록_정재욱_차동훈_한경우

주최 / 서울시립미술관 기획 / 이진명(미술비평,독립기획자)_김기라 문화공작소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난지갤러리 NANJI GALLERY 서울 마포구 하늘공원로 108-1 Tel. +82.2.308.1071 nanjistudio.seoul.go.kr




백년몽원(百年夢源) ● "미국의 발견은 예술 종말의 시작이다." (오스카 와일드)( Alvin Redman (ed.), The Wit and Humor of Oscar Wilde, Dover Publications, 1952, 122p. "the discovery of America was beginning of the death of art.") "일급 문제는 이렇다. '진리에 대한 의지'가 과연 어느 정도로까지 '사물의 깊이'를 관통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피에르 클로소프스키)( Pierre Klossowski, Nietzsche and the Vicious Circle, The Universty of Chicago Press, 1997)
안두진_The cave_캔버스에 혼합재료_97.5×146cm_2010


주지와 같이 이번 기획의 이름은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안견이 그렸다는 전설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몽원이라는 낱말과 한 개인의 일생의 시간을 상징하는 백년이 함께 구성된 합성어다. 그리고 지난 한세기 백년을 성찰함과 동시에 앞으로 도래할 또 다른 백년을 절차탁마 준비하는 작가들의 비전을 들여다본다는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며, 또한 비전의 제시야말로 백년 동안 한 개인이 세계에 제시하는 이상, 즉 몽원이 된다. ● 그러나 시절이 그저 녹록하지만은 않다.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더 이상 인간은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라고 말했을 때의 정확한 의미는 역사의 변증법적 모순이 완전히 지양된 상태, 즉 유토피아를 의미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 앞의 세상이 모순과 대립으로 뒤엉켜있을 때 이 무기력함은 유토피아이기는커녕 지옥일 것이다. 아니면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제시하기보다 차라리 사뮤엘 버틀러가 제시한대로 '유토피아란 에레혼(erehwon)'이라는 말을 상기하는 편이 낫다. 에레혼을 뒤집어서 절망적으로 바라보자면 '노웨어(nowhere)', 즉 '아무데도 없다.'이거나 그나마 희망적으로 바라보자면 '나우 히어(now here)'이다. 즉 '바로 지금 이곳'이라는 뜻을 정확히 파악해서 현실을 대처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멋진 태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 20세기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 즉 막스 베버와 칼 마르크스의 대립, 이와 동시에 얽힌 유대주의(Zionism)과 반유대주의(anti-Semitism), 기존의 가치에 대한 보수적 찬동과 이에 대한 비평적 대안주의가 복잡하게 얽혀 과열된 구조에서 스스로 폭발한 빅뱅, 즉 양차 세계대전의 절대적 영향 아래 진행되었다. 이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모더니티의 결과는 표면적으로 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일단락되었으나, 이후 전장의 포성은 서구 진영과 동구 진영의 완벽한 차단이라는 이치관념(二値觀念)의 포성 없는 이데올로기 전쟁, 쉬운 말로 냉전으로 탈바꿈한다. 서구는 무한자유와 인권이라는 기치를 내걸었으며, 동구는 평등과 해방이라는 선전문구를 남용했다. 이 시점부터 유럽의 계몽주의 프로젝트인 이성적 모더니티의 동력은 신대륙 미국의 자유방임적 시장주의 경쟁체제로 이양되었고 50년대 미국의 패권주의가 비로소 싹을 틔었다. 예술에 있어서도 전세계는 추상표현주의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모든 물감을 한곳에 흩뿌린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은 인상주의, 야수파, 입체주의, 구성주의 등 일련의 유럽적 진보를 미국이라는 단일한 용광로에 일단 녹여서 재생산한 결과물의 총체적 상징으로 각광을 받았다. 이후 미국의 자신감은 더 한 발자국 진전해서 팝아트라는 슈퍼스타를 창출했다. 유럽적 계급주의와 다르게 노동자와 상원의원이 똑같은 맛의 콜라를 즐기는 모습의 신문화란 얼마나 멋지냐며 미국을 선전했다. 또한 체제경쟁에 있어서도 동구에 대한 상대적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미국의 보이지 않는 수많은 기도들이 암약(暗躍)했으며, 사실상 이는 슈퍼스타 예술가들을 배출하려는 미국 정부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왜냐하면 미국 내부는 소비에트를 위시한 동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보일 절대적 필요가 있었으며 예술이라는 매체 안에서 순수하게 존재함으로써 체제 선전으로 남용되는 동구의 정치적 프로파간다 예술보다 우위에 있다는 근거를 내세웠던 것이다. 서구가 동구를 압도한다는 주장의 근거로써 순수성(purified)과 보편성(universality)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 결과는 주지와 같이 형식주의의 지속적 강화와 단련이었고 이는 대성공이었다.
유승호_bzzz…_종이에 잉크_200×157cm_2007
장종완_chan chan_종이에 색연필_70×100cm_2010


이러한 인위적 분위기에서 20세기는 새로운 일신의 기회를 한차례 맞이했다. 1963년 흑인의 정치 참여권이 미국 의회에 의결되었으며, 여성의 평등권 역시 보장되었다. 더욱이 1963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인간의 모든 차별과 박해를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1965년 베트남 전쟁의 발발에 대한 항거로써 플라워 무브먼트가 전미에서 봉기되었다. 그리고 1968년 프랑스에서 5월 혁명이 일어났다. 두 달에 걸쳐 실패로 끝난 이 프랑스 학생운동은 그 동안 권위, 계급, 위계, 복종의 미명 아래 봉인되었던 진보적 정신을 깨어나게 한 결정적 동인이었다. 즉, 프랑스 몇몇 학교의 학생봉기로 시작된, 표면적으로는 실패했으나 사실 역사적 동력으로 작용한, 이 작고 위대한 사건은 점차 유럽인들로 하여금 종교와 애국주의, 권위에 대한 굴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고취시켰고, 이후 전세계 지성과 문화계는 평등, 인권, 해방, 공동체주의, 생태라는 전대미문의 진보적 가치를 공유하기에 이른다. ● 이런 분위기에서 하랄트 제만의 "태도가 형식이 될 때"라는 전설적 전시가 1969년 스위스의 작은 도시 베른에서 개최되었다. 이 전시를 계기로 세계 예술가들은 마음 속으로부터 형식주의의 권태로부터 벗어나 개념미술이 지향하는 세계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견지하게 된다. 예술가의 세계에 대한 진정한 태도야말로 바로 형식 그 자체이며 조각, 설치, 회화라는 견고했던 물질적 감옥의 요구로부터 해방되어 세계에 적극적으로, 그것도 자유로운 형식으로 발언할 수 있는 출구가 열렸다. 이때 개념 미술가는 세계에 대한 네러티브, 세계에 대한 감수성, 세계에 대한 실험을 자유롭게 진척시킬 수 있었던 야망의 전제적 주체일 수가 있었고, 현재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 파편화된 사적 관심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애초에 다니엘 뷔랭, 한스 하케, 요셉 보이스, 백남준 등은 개념 예술가와 정치적 예술가 사이의 구분이 불가능했다. 진정 그들의 개념은 세계, 사회, 문화 일반, 정치경제, 우주, 역사, 성, 인권을 총괄적으로 이해하는 수단이자 기획이었으며 예술을 통한 사회 변혁의 목적을 정확히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때부터 유럽 대륙과 영미권의 무게가 균등을 이루거나 유럽 쪽으로 기울어졌다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Jorg Obergfell_strangefolly_혼합재료_70×80×50cm_2008
The Whole Picture of the Incident a hanging old woman C print_180×225cm


문제는 70년대 유럽 미술이 세계에 대한 비판적 실험을 추구하는 개념미술의 물이 올랐던 반면 미국의 경우 심각한 형식주의 모더니즘(high modernism)이 공룡화되어 사회에 대한 그 어떤 발화도 중지한 채 대중에 권태를 안겨주었던 점이다. 더군다나 1976년 창간된 영향력 있는 아이비리그 출신들의 슈퍼 엘리트층들이 공모한 '옥토버' 집단의 학술적 천착으로 인해 작가나 대중들의 방향감에 혼란이 생겼다. 그들은 모더니즘, 곧 형식주의에 대한 반발의 기치로서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을 선망했고 이는 역사적으로 어쩔 수 없는 필연적 선택이기도 했다. 그런데 분명히 이는 곧 미국의 입맛에 맞게 변형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로 둔갑되었다. 그리고 미술, 비평, 이론, 정치의 유기적 일치를 꾀했던 그들의 전략과 영향력이 증대할수록 미술에 있어서 운동이나 생명력 있는 근원적 아방가르드가 퇴색해갔다. 작가들은 프랑스 이론들을 기꺼이 알아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리게 되었고 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수식과 미술 본연의 임무를 혼동하기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말해서 서구의 역사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태생부터 애매한 정체성이었고, 비본연적 자기 위로였으며, 모더니즘의 권태가 누적되어 쌓인 일시적인 신경질적 폭발이자, 이를 타계하려던 초강수의 처방전이었지, 결코 역사적으로 내밀한 자기 발전의 과정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 더욱더 큰 문제는 80년대부터인데, 이때부터 미국에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고 영국 정부가 대처주의(Thatcherism)를 표방함에 따라 세계에 대해 영미 공조체제가 재편되었다. 이때부터 세계 시대정신은 강경주의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선택한 것이다. 노조에 대한 강경주의, 복지축소를 통한 재정확대, 기업 세제를 약화시키고 기업에 지원금을 늘려주는 기업친화정책, 강한 정부와 약한 국민, 국민 우민화 정책을 통한 엔터테인먼트 활성화와 이에 상반된 인문학 퇴색 현상, 강경화 일색의 대외정책, 전쟁 선호, 약자를 먹이 삼아 벌어들인 경제력 등 그 모든 것이 우경화되어 갔다. 더구나 1981년 제너럴 일렉트릭(GE) 전 회장 잭 웰치(Jack Welch)는 취임연설에서 '주주가치(Shareholder's Value)'(Ha-Joon Chang, 23 Things They Don't Tell You about Capitalism, Allen Lane, 2010, 17p.) 라는 말을 간접적으로 사용했다. 주주에게 이득을 돌려주는 경제정책이야말로 새로운 패러다임이며 가장 이상적인 성공전략이라는 것이다. '중성자탄'과도 같은 그의 전략은 회사의 가치를 40배로 키워갔다. 그 반대급부로 11만 명의 노동자가 해고되었으며 주주 이익금을 위해서 기반 시설에 투자하지 않아 대기업 산하 회사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복지나 후생은커녕 생존 자체가 절박한 문제였다. 대처리즘의 영국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며, 초특급 부유층들이 등장할 때마다 동시에 대량의 무직업 노동자들이 거리에 속출했다. 더군다나 충격적이게도 1989년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되었고 그간 영미가 내세웠던 가치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실화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예술계에서도 보수적 상업주의 미술가들이 등장했다. 데이비드 살르, 로버트 롱고, 에릭 피슬 등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영광스러운 가면을 썼던 작가들의 실제 얼굴은 너무나 초라하게도 보수적 상업주의 예술가의 모습이었다. 이렇듯 사회적 분위기가 우경화될수록 브루스 나우만, 존 밸드새리, 폴 매카시, 크리스 버든, 빌 비올라와 같은 비평적 저항주의 예술가들의 중대성이 그만큼 도외시되었고, 이들 역시 예술을 한다는 자기 본연적 의무를 사회비평적 메시지에서 시각적 쾌락주의로 부분 수정해야만 했다. 90년대 휘트니 미술관은 휘트니 비엔날레의 요체 작가들을 대거 자기 미술관에 안착시켰으며 이를 전세계에 순회 전시로 돌렸다.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포스트구조주의의 근본 정신과 무관하게 미국 미술관들의 입맛에 맞게 변형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쾌락주의만이 세계에 수출되었고 이식되었다. 이때부터 문화의 세속주의화에 가속도가 붙었다. 세계를 운영하는 정책과 정치성에 대한 비평적 저항주의로서의 전지주의적 조절자 역할은 미미해져 갔으며 특정집단의 파편적 자기 주장만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를 가리켜 전지주의적 이야기꾼으로서의 예술가의 자기 파편화라고도 하며, 호메로스적 인간의 절멸이나 퍼스널 네러티브의 도래, 혹은 거세된 거대 담론 시대의 개인 등의 말로 표현할 수 있다.
Wil Bolton_binary_설치


우리의 경우 1985년 이후 문화담론의 대부분을 자체적으로 생산하지 못하고 미국과 독일,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수입해왔기 때문에 위에서 일련의 흐름을 정확히 목도해야만 한다. 특히 80년대는 정치적 참사와 민주화라는 양극단이 동시에 양립 극화되었고, 경제에 있어서도 성장주의라는 대국적 명분과 착취라는 보이지 않는 분명한 갈등이 존속했던 시기였다. 예술에 있어서도 미니멀리즘과 모노크롬 페인팅으로 일괄되는 엘리트주의와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한반도 토착 사상을 절충한 민중미술이 양극으로 대립했다. 그러나 이 팽팽하게 긴장했던 이치관념은 1989년 현실적 사회주의의 붕괴와 세계화, 글로벌 감각의 체득과 함께 자체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90년대, 드디어 유학파가 본격적으로 기관 곳곳으로 수용되었고 특히 1994년 '휘트니 비엔날레 인 서울'을 계기로 미국 주도의 미술이 유행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미국화된 미술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진수로 오인되면서 비평적 의식보다는 개인 각자의 자기 로고와 자기 브랜드를 공포하면서 지명도와 상품가치를 높여가는 전략적 상업주의 미술이 세를 이루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글로벌리즘을 수용해야만 한다는 초조감이 팽배했다. 이와 동시에 글로벌 감각을 문제로 삼을 때마다 지역주의(locality)의 문제가 동시에 고려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부정성(negativity)의 문제가 늘 꼬리표처럼 붙었다. ● 2000년대 초기의 정치 경제 분야의 정신을 지배했던 글로벌리즘을 미술 문화적 언어로 번역한다면 바로 유목주의에 해당한다. 유목주의란 주지와 같이 자원을 자체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자원을 수렵하고 채집하는 이동성 문화양상을 가리킨다. 이미지의 차용과 매체의 다각적 수용이 보장되며, 네러티브의 정격화가 아니라 부정형의 네러티브가 규칙 없이 확장되는 분위기를 긍정하는 양상을 가리켜 일괄적으로 유목주의라고 표현한다. 부정성이란 후기 식민주의 철학의 용어이자 논리이다. 서구는 비서구권 사회를 언제나 타자로 규정하고 비서구권 사회가 언제나 서구화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서구화의 성과를 얻었을 때조차도 문화의 정체성에서만큼은 진정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와 다름을 주장함으로써 타자가 서구미술의 신화가 되는 것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검역시켰다. 따라서 우리는 서구의 기관과 구조에 전적으로 의지해서도 기대해서도 안되며 동시에 아시아적 가치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해서도 곤란하다. 서구의 시각과 구조에 편입되길 기대하는 일이란 불가능한 사랑에의 목마름이고, 미술에 있어서 아시아적 가치만을 주장하는 것은 중독성 없는 술이나 질병 없는 홍등가를 바라는 이기적 욕망과도 같다. 우리가 여기만큼 온 것도 실은 서구 따라잡기 신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독소만을 제거하자는 주장은 숙취 없는 아름다운 압상트를 창조하자는 논리와 같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일단 우리는 출구가 막연해 보인다. 그러나 "비관론에는 출구가 없다."는 황런위 선생의 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 따라서 여기 '백년몽원'이라는 전시 주제는 첫째, 한 주체로서의 개인이 평생 제시해야만 하는 개인의 외부세계에 대한 적극적 태도를 지지하며 표방한다. 둘째, 어차피 현재 상황에서 미술이란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출발해야만 하며 이 버거운 실존적 무게감을 공유하자는 제스처이다. 셋째, 몽유도원도라는 개인의 꿈과 지평의 수직적 확장과 분기로써의 나무(tree)를 부인하고 수평적 확산을 지지하는 리좀(rhizome)으로서의 고원(plateau), 즉 중심과 축, 수직적 위계나 가치의 확정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실험적 자아로서의 주체인 예술가의 태도를 함축한 말이거니와 수많은 고원을 자체적으로 연계하자는 제안이다. 넷째, 현시점에서 볼 때 자기 처지는 언제나 불안하고 불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장기적 합리성을 고려해보고 인생의 기간을 백년으로 길게 본다면 우리 모두는 분명히 새로운 출구를 돌파할 수 있다. 그 시작의 미미하지만 희망을 갖자는 제안으로 이번 전시의 궁극적 의미를 둔다. ● 여기 참여하는 20명의 작가들은 한국의 작가들 외에도 스페인, 네덜란드, 독일, 일본, 캐나다, 영국 등 다국적이다. 이전 백년의 역사로부터 향후 백년의 뉴 페인팅의 진로를 모색한 작가, 한국적 채색의 생명력 있는 신비를 끌어올린 페인팅, 샤머니즘과 세계를 초지일관 관철시키는 개인, 동양화의 정신과 서구 매체를 충돌시키는 실험자, 키치 문화의 상층 문화로의 승격과 상층 문화의 세속화를 전도시키려는 사람, 역사의 국지성을 보편적 감수성으로 확장시키려는 의지의 인물, 지구 환경의 문제의식을 업으로 삼는 작가, 사회의 비극적 요소를 예술적 요소의 희극으로 치료하려는 시도자 등 실로 너무나 다양한 주체들이 모였지만 모두다 어느 특정 분파가 아니라 지속적인 실험을 감행하는 작가들로 구성되었다는 사실 아래 그들은 하나의 주제로 포섭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은 바로 백년몽원이다. ■ 이진명_김기라

서울시립미술관의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5기 입주작가 기획전시 『2011 NANJI ART SHOW』를 개최합니다. 전시는 현재 입주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에 의해 기획되었으며, 입주기간이 끝나는 10월말까지 10회에 걸쳐 지속적으로 진행됩니다. ■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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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ng things




박지혜展 / PARKJIHYE / 朴知慧 / painting 2011_0824 ▶ 2011_0829




박지혜_Regard 1002_캔버스에 유채_162.2×112.1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70817c | 박지혜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824_수요일_06:00pm

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시선을, 빼앗기다. ● 단숨에 눈길을 사로잡는 장면들이 있다. 걸음을 멈추게 하고, 시선을 붙들어 매버리는 그런 장면들 말이다. 박지혜는 그런 장면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시선의 작용을 이끌었던 모티브들은 나아가 본인으로 하여금 그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될 어떠한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그녀의 그림들은 무엇보다도 그녀의 시선을 앗아간 장면들이다. 그래서 Regard. ● 시선을 나타내는 많은 단어들 가운데 하필이면 Regard. 그저 '바라보기'를 뜻하던 불어 regard는 메를로-퐁티와 라캉을 거쳐 색다른 의미를 덧입었다. 통상 영어로는 gaze, 우리말로는 응시라고 번역되는 이 말은 주체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주체가 보여지는 시선, 주체를 사로잡는 세계의 시선을 뜻한다. "그들은 단지 본인에 의해 보여지는 수동적인 객체가 아닌, 마치 자신을 보라고 격렬하게 움직이는 듯하며 시선의 운동을 이끌어내는 원동이자 주체로 존재하는 듯 했다. '~을 보았다'라는 표현보다는 '~에 시선을 빼앗겼다'라는 표현이 더욱 적합할 당시의 경험은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관계가 서로 뒤엉켜 있는 시각장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박지혜_Regard 1101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1
박지혜_Gesture 1001_캔버스에 유채_97×145.5cm_2010
박지혜_Regard 0904_캔버스에 유채_145.5×112.1cm_2009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는 본다. 우리의 망막에 자신의 인상을 스치듯 남기는 수도 없이 많은 것들을. 그러나 그 모든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는 않는다. 오직 특정 장면들만이 우리의 눈과 마음을 함께 사로잡아버리는 것이다. 박지혜의 그 장면들은 너무나 일상적인 것들이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누군가의 유난스러울 것 없는, 어디서 한 번쯤은 보았을 법한 하루의 한 순간.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 독특한 특성들이 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의 면면은 주로 누군지 알 수 없을 익명의 여인들의 '뒷모습'인데, 이 여인들은 하나같이 조금 마른 듯한 몸매에 고개를 살짝 비트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왜 하필 이런 장면들에 시선을 빼앗겼을까? 박지혜는 본인의 시선이 여성들의 뼈와 근육의 섬세한 움직임에 유독 민감하게 가 닿는다고 말한다. ● 하지만, 어째서 늘 뒷모습인가? 박지혜의 그림에는 언제나 여인이 중심 모티브로 등장한다. 인물이 등장할 경우, 보는 이는 으레 인물의 얼굴생김부터 훑어나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작가가 포착하는 장면이 언제나 뒷모습이기 때문에, 그런 통상적인 그림보기 절차는 좌절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작가의 시선을 빼앗았던 작고 섬세한 것들―몸의 움직임에 따른 근육과 뼈의 모양새, 옷의 꽃무늬, 레이스 문양 등―이 그림의 중심이 되어 오롯이 솟아오른다. 작가가 굳이 늘 뒷모습을 그리는 것은 얼굴보다는 몸, 엄밀히 말하면 섬세한 근육과 뼈의 미세한 움직임이 담고 있는 표정,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감성에 더 사로잡혔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니 여윈 몸을 그리는 것이 마땅했을 터. 그녀 그림에 등장하는 팽팽하게 힘이 들어간 목과 등의 뼈, 그리고 근육이 만들어낸 선은 다름 아닌 감정선이다.
박지혜_Regard 0905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09
박지혜_Regard 0906_캔버스에 유채_145.5×97cm_2009


이렇게 박지혜의 Regard에는 주체의 관심과 대상의 감성이 연루되어 있다. 그리하여 본다고 생각하는 보여지는 주체와 보인다고 생각되는 보여주는 대상 사이에서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 일어난다. "본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시선의 정지된 순간이 아닌, 시선의 작용들이 횡행하는 운동의 장이다." 그녀의 그림은 주체를 사로잡은 응시와 주체의 능동적 시선의 교차점인 것이다. ● 이러한 섬세하고도 역동적인 시선의 교차를 놓치지 않고 화폭에 담기 위해 박지혜는 많은 경우 모티브가 되는 장면을 찍고, 그 사진과 당시에 느꼈던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기억을 바탕으로 드로잉을 한다. 그리고 다시 그 장면을 생생하게 담아내기 위해 글레이징 기법을 사용하여 유화를 그린다. 이처럼 사진을 바탕으로 하니, 그녀의 작업이 사진과 닮은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흔히 극사실주의, 혹은 포토리얼리즘이라고 분류되는 그녀의 작품 앞에서 보는 이는 그 탁월한 사실적 묘사에 첫눈을 빼앗긴다. 감탄한다. 확실히 글레이징 기법은 고광택 인화지에 인화된 사진의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는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다. '사진 같다'는 말이 화가에게 칭찬이 아니게 되는 지점은 그림의 의미가 정말 실물 같다는 인상에서, 다시 말해 작가의 테크닉의 집대성이라는 인상에서 끝나는 순간일 것이다. 사진과 비견하는 가운데 작품의 의미가 소진된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 그런데 박지혜의 작품은 쉽사리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시선을 붙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다만 작가의 시선을 빼앗았던 그 장면들을 정말로 사실적으로, 사진 같이 극도로 세밀하게 묘사해내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테크닉은 잠시 우리의 시선을 빼앗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시선을 뗄 수 없게 붙들어놓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우리의 눈앞에 내미는 이런 소소한 장면에 붙들려 서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왜 우리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한동안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는가?
박지혜_Regard 0907_캔버스에 유채_130.3×193.9cm_2009


혹시 '뒷모습' 때문은 아닐까 상상해본다. 낯설지만 낯익은 이 뒷모습들. 어디서 본 듯하지 않은가? 어디서 보았을까? 흥미롭게도,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뒷모습들은 응시의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뒷모습이기 때문에 그 응시를 익명성 속에 감추고 시선의 주체성을 보는 이에게 돌려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시선을 빼앗아간 그 장면을 이제 시선의 주체가 되어 마음껏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찬찬히, 구석구석. 아무리 뜯어보아도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그 뒷모습, 그럼에도 어디선가 본 듯한 이 낯설고도 친숙한 느낌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며 기억 속 어딘가 켜켜이 묻어두었던 심적 이미지를 퍼 올리도록 한다. 이러한 길어 올림에는 필경 묘한 감정적 울림과 향수가 동반되기 마련이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그때 거기가 그림을 통해 지금 여기로 이어질 때 생겨나는 그 울림을 누군가는 아우라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 이제 그림의 시선, 응시는 보는 이의 내면 깊은 곳을 향한다. 어떤 이미지를 길어 올렸건, 그것은 다만 보는 이 자신의 경험의 투사일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예술 경험은 작품에 자신을 되비추는 반조적(reflexive) 경험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연못에 비친 제 모습에 반한 나르시스처럼, 우리는 아마도 이미지가 자신을 되비출 때 그 이미지에 가장 강하게 붙들리는 것 같다. 그리하여 보는 이가 한동안 그림의 응시에 붙들리게 되는 것일 지도 모른다. ●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무엇이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지. 그러나 바로 그래서 눈길을 빼앗긴 채, 쉽사리 눈을 뗄 수 없는 작품들이 있다. 박지혜의 작품처럼. ■ 정수경

Stolen is the Attention





인식적 풍경




신희섭展 / SHINHEESEOP / 申憙燮 / painting 2011_0824 ▶ 2011_0830




신희섭_서울역_장지에 채색_190×288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722c | 신희섭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824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더케이 갤러리 THE K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6번지 Tel. +82.2.764.1389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문화의 거리'가 과연 말이나 됨직한 장면인가 싶을 때가 있다. 이 아이러니한 문구를 그대로 재현해 본다면 얼마나 정신없는 거리가 될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언제나 현재이자, 과거로 흘러가는 도시의 풍경은 공존이라기보다 오히려 시간의 간극에 가깝진 않은지 고민해 볼일이다. ● 작가 신희섭의 작업은 이러한 고민에서 출발한 듯하다. 규정 불가능한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개인에게 인식되는 장면은 현재 위에 얹혀진 과거의 장면에 불과하다. 작가는 이러한 장면들을 나열하고 재조합함으로서, 다분히 동양적인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신희섭_그후_장지에 채색_117×91cm_2011
신희섭_무제_장지에 채색_46×53cm_2011 002
신희섭_무제_장지에 채색_130×162cm_2011



'인식적 시각으로 본 풍경' ● 삐익~,환승입니다~,삐익~ 환승입니다~...버스에 올라타는 어느 여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나이는 20대초반 ,청바지에 분홍색과 흰색이 잘 조화된 옷을 입고 있다. 발랄한 느낌이다. 빈자리에 앉자마자 핸드폰을 거울삼아 앞머리를 만진다. '다음 정류장은...' 이라는 안내 방송이 들리는 순간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보낸다. ● 창가에 머문 시선은 고정되고 생각은 어제 사진을 찍던 건물을 생각한다. 가로수가 기괴한 형태를 하고 있다. 건물 상가 안에는 흥정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세일을 하나보다... 다시 도서관 안 벽시계에 시선이 간다. 3시 30분을 가리키며 똑딱 똑딱 거린다. 뒤에서 책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흰 면T에 청바지 손에는 무언가를 들고 문안으로 들어오는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다시 창밖에 시선이 간다. 와이셔츠에 면바지를 입은 중년남자 담배를 피며 건물 유리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서있다. 담배를 끄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도로에서 기계음이 귀를 찌른다. 창 밖으로 시선이 간다. 도로공사를 하고 있다. 이 놈의 서울 도로는 거대한 공사현장이다. 새벽에도 서울 도로는 파헤쳐지고 매꿔지며 쉴 틈이 없다. 사진을 찍을까? 하는 생각에 사진기를 가방에서 꺼내다 다시 집어넣는다. 버스는 다시 출발한다. 도서관 안 벽시계는 4시 45분을 가리킨다. (작가노트 中)

신희섭_서커스_장지에 채색_117×91cm_2011
신희섭_풍경_장지에 채색_122×200cm_2011


시간의 흐름에 근간을 두는 문학과, 시각의 흐름에 근거하는 그림을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재구성하는 셈이다. 원근과 시점을 무시한 다양한 교차점들은 마치 빠져 나올 수 없는 미로처럼 우리의 현재와 일상을 어지럽힌다. 과감한 컬러의 사용과 가벼운 붓의 운용 또한, 잘 정돈된 도시의 이면을 고발하는 듯한 작가의 시선을 충실히 재현한다. ● 그렇지만 작가가 다루는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이며,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평면의 화면위에 풀어내기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을 줄로 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작가에게 집중하고 그가 가진 진정성에 주목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범주를 날마다 조금씩 확장해가며 관찰과 기록을 게을리 하지 않는 작가의 성실성 또한 우리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이번 개인전 또한 작가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중요한 가교역할이 될 것은 당연하다. 그의 치열한 시간 속에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태며, 동시에 본 전시를 위해 더운 여름 힘써준 작가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 고경





잿빛침묵 ashy silence




백승섭展 / BAEKSEUNGSEOP / 白承燮 / painting 2011_0824 ▶ 2011_0830




백승섭_대화-result_한지에 먹_73×91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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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더 케이 GALLERY THE K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6번지 Tel. +82.2.764.1389 www.gallerythek.com blog.naver.com/gallery_k




잿빛 침묵은 세상을 바라보는 주관적인 시선의 맹점으로 시끌벅적한 도시소음과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인 풍경의 이면이라고 볼 수 있다. 쏟아지는 이슈 속에 대중매체를 따라 모두가 의심 없이 동화되고 비슷한 가치관을 형성하며 혼자보다는 무리 속에서 안정을 찾는 그들의 모습은 울타리 안에서 포장되고 균일화되는 성향을 가지며 바람에 함께 흔들거리는 수풀같이 색을 잃어버리고 딱딱해진 모습과 같다.
백승섭_Captured sofa_한지에 먹_92×174cm_2011
백승섭_Dinner time_한지에 먹_123×347cm_2011


가시적 사회풍경을 불러들이고 재맥락화하여 나타내는 과정은 사회적인 여러 관계 속에 나와 연계된 소소한 것에서 추출되어지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일상의 풍경이 주관적 관점을 거쳐 나오는 일련의 과정에서 침묵으로 개입하여 관계에 무게를 더하려는 것이다. 듬성듬성 자리를 잡고 있거나 뭉쳐있는 수풀, 여백으로 나타난 공간은 도시의 바쁜 삶 속에서 물줄기처럼 혹은 누군가가 이전에 터놓은 길처럼 흔적과 기억의 편린이고 우리의 삶에서 수시로 생겨나고 사라지고 얽히기도 풀리기도 하는 관계의 표상인 것이다.
백승섭_Table_한지에 먹_90.5×169cm_2011
백승섭_도시의터_한지에 먹_61×164cm_2011
백승섭_월계수_한지에 먹_131×131cm_2011


화선지 위에 수묵으로 나타난 작업은 전통적인 수묵의 형식에서 시점과 구도를 달리하나 먹을 도구로 인식하기 전에 寫意에 무게를 두며 하나하나의 붓질과 먹이 스며들고 번짐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우연성과 필연성을 만나 떠있는 것 같은 허황된 삶 속에서 침착하게 가라앉아 더욱 심중에 가까워지길 스스로 바라며 수묵에 대한 실험이 동시대 수묵화에 의미를 찾기를 바란다. ■ 백승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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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결


이은미展 / LEEEUNMI / 李銀美 / painting 2011_0824 ▶ 2011_0906



이은미_ L _캔버스에 유채_50×6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61130c | 이은미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_02:00pm~07:00pm

사이아트 갤러리 CYART GALLERY 서울 종로구 안국동 63-1번지 B1 Tel. +82.2.3141.8842 cyartgallery.com



바람(風)과 볕(景), 그 사이와 그 너머1. 여기, 한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긴 바지에 긴 소매의 옷을 입고 가방을 멘 채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사람. 동그스름한 몸의 윤곽이나 약간 긴 단발의 머리는 이 사람이 여자임을 짐작케 한다. 부드럽고도 조심스럽게 흔들리는 그림자. 마치 물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이 사람은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고 있다. 얼핏 보면 물을 마시는 것도 같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듯하다. 무언가를 잡은 그녀의 두 손이 눈높이에서 멈춰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진기, 어쩌면 망원경, 아니 그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녀가 지금 '바깥'으로 나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 이은미의 다섯 번째 개인전의 맨 앞자리에 있는 「L」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몇 해 전 네 번째 개인전에서 이 작가는 '실내'라는 공간에 자리하고 있던 '사물'들을, 그 사물과 함께 호흡하고 있던 이미지들이 만들어 내는 서사들을 오롯이 마주했었다. 이제 「풍경, 결」이라는 표제로 작가가 처음 제시한 작품에는, 실외에서 뭔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 'L'은 작가 자신을 암시하는 것이리라 짐작해 볼 수 있지만, 사실 'L'이 무엇을 의미하더라도 혹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작가가 닫힌 공간의 정물에서 열린 공간의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L」을 보며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 어떠한 정경이나 장면을 나타내는 말로 두루 쓰이는 '풍경(風景)'은 기본적으로 자연의 경치를 일컫는 말이다. 바람(風)과 햇빛(景)의 공명으로 인해 펼쳐지는 것이 풍경이라면, 풍경이라는 말에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혹은 가려진 것과 드러나는 것이 공존하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질감, 빛, 색, 모양, 움직임, 깊이 등을 아울러 우리는 '풍경의 결'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풍경, 결」에서 「L」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이 저마다 표현하고자 하는 풍경의 결, 그것이 「L」의 그녀가 포착하고 응시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은미_빛의 의존Ⅰ_캔버스에 유채_53×66cm_2011


2. 「풍경, 결」에 나오는 소재들, 즉 문과 벽, 집과 나무, 그림자와 하늘 등은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작가는 익숙한 소재를 내세우되 일부러 이들의 색을 낯선 것으로 바꿔 놓았다. 물빛의 문, 보라색 그림자, 초록 지붕과 분홍 벽 등. 이는 이 작가가 풍경을 그리는 목적이 단순히 자연을 모사(模寫)하거나 재현(再現)하는 데 있지 않음을, 좀 더 섬세하게 말하자면 재현되는 대상보다 재현하는 자의 의도와 관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암시한다. 낯선 색을 입은 익숙한 소재들은 하나의 공간에서 친근함과 생소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이 색들이 낯선 감각의 환기만을 의도한 것이었다면, 이들은 좀 더 강렬한 빛을 띠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들은 오히려 그렇게 보일 것을 염려했기라도 한 듯 투명하고 맑다. 소재의 친근함과 색이 만들어 내는 생소함은 겹쳐지고 미끄러지면서, 그림은 확언(確言)이 아님을, 고정된 의미란 어디에도 없음을 드러낸다. ● 「풍경, 결」의 풍경들에서 우리는 반복해서 '일렁임'을 감각한다. 이 일렁임을 가시화하는 것은 그림자라 할 수 있는데, 그림자가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작품은 네 점 정도이다. 햇빛으로 인해 그림자는 존재하게 되고, 햇빛의 각도에 따라 그림자의 모양은 변한다. 그러나 이은미는 이를 '빛에 의존'이 아닌 '빛의 의존'이라 명명했다. ● 빛의 존재 또한 그림자에 깃들어 있음을, 빛과 그림자가 함께 만들어 내는 것이 풍경임을 이 작가는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그림자들이 모두 나무 그림자라는 점이다. 언뜻 불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그림자들은 정지해 있는 듯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들은 벽을 타고 오르고 있거나(「빛의 의존Ⅰ」), 계단을 내려오고 있으며(「빛의 의존Ⅱ」), 집을 잠식하려는 듯 집의 외벽에 다가가고 있다(「집」). 나무 그림자들의 일렁임, 이 움직임은 고정된 형태나 윤곽을 지우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이은미_집_캔버스에 유채_53×73cm_2011


이는 「집」에서 한층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그림에서 바닥을 뒤덮고 있는 것은 움직이는 그림자 같기도 하고, 흔들리는 수풀 같기도 하다. 또 이것은 출렁이는 물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의도된 모호함은 고정된 어떤 형태로 호명되는 것을 거부하고, 오로지 색과 움직임만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크고 부드러운 흔들림, 그것은 「빛의 의존」 연작에서 감지할 수 있었던 나무 그림자들의 일렁임과 유사하다. 무언(無言)의 일렁임은 집을 향하고, 집을 둘러싸며, 집의 윤곽마저도 흐리게 만든다. 이러한 윤곽의 처리는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와 관점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의 공간은, 단순히 그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사물을 담기 위한 그릇이 아니다. 풍경화의 경우 이는 더욱 자명한 사실이 된다. 풍경화에서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이고 배경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대상과 배경을 나누는 일은 가능한 것인가('배경'이란 말은 대상에게 봉사하는, 대상을 '위해' 그 무엇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하늘과 집과 나무와 그림자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 풍경이다. 그러므로 이들 각각의 형태와 위치를 구분하고 구획하는 경계를 흐릿하게 표현하는 것, 이는 삶 혹은 세상의 진실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 이는 이 작가가 '벽'과 '문'이라는 소재를 자주 다루고 있다는 것과도 연결된다. 이번 전시에는 「문」이라는 제목을 단 두 작품이 있다.
이은미_문_캔버스에 유채_50×65cm_2011


문과 벽은 안과 밖의 경계이자,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동시에 안과 밖 둘 다를 포괄하는 것이다. 푸르스름한 문은 열려 있으나 그 안을 엿볼 수는 없다. 문 안 쪽의 보이지 않는 곳은 마치 심연처럼 어둡고 깊다. 담벼락에 있는 문은 닫혀 있지만 담장 너머로 보이는 연한 빛깔의 하늘은 문 안쪽의 공간을 상상하게 한다. 즉 이 두 문은 이쪽과 저쪽을 모두 보여줌으로써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생각하고 상상하게 한다. 이쪽과 저쪽뿐만 아니라 이쪽과 저쪽 그 사이까지도 포착하려는 시도는 「겹」에서도 잘 나타난다. '겹'이란 면과 면 또는 선과 선이 포개진 상태, 그 자체를 중요시하는 말이다. 「겹Ⅰ」과 「겹Ⅱ」에는 식물들의 뿌리와 줄기가, 이파리와 꽃들이 서로 겹겹이 포개어져 있다.
이은미_겹Ⅰ_캔버스에 유채_97×130cm_2011
이은미_겹Ⅱ_캔버스에 유채_146×112cm_2011


「겹Ⅱ」에서는 점점이 하얀 꽃이 피어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밝은 하얀 색에 의해 이것이 꽃송이라는 것을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이 꽃의 세세한 모양을 알 수는 없다. 서로가 서로를 침범하듯, 얽혀있는 줄기와 이파리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더욱 깊어지는 색. 이는 「겹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에는 줄기와 이파리들 각각이 만들어 내는 낱낱의 움직임과 이들이 한데 엉켜 만들어 내는 무성한 움직임이 공존한다. 거대한 물결과 같은,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이 안에 바람이 존재함을 느낀다. 바람은 줄기를, 이파리를 흔들며 자신을 드러낸다. 줄기와 줄기 사이, 줄기와 이파리 사이로 바람은 스며들고, 그 겹겹의 바람은 크고 묵직한 울림을 만들어 낸다.
이은미_한 권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1


3. 실제로 이 작가는 오랜 시간을 두고 여러 번 색을 덧입히며 작업을 진행한다. 한 번의 붓이 지나가고 그 다음의 붓이 오기 전까지의 시간. 그것은 물감이 마르는 동안의 물리적인 시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사이, 작가는 기다리고 고민하고 망설인다. 그러므로 색이 색을 덧입는 것만은 아니다. 캔버스에는 작가의 기다림이, 기다리는 동안의 사색이, 사색 뒤에 오는 머뭇거림이 덧입혀진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들은 붓이 지나간 흔적을 지우는 쪽으로 작가의 손과 마음을 이끈다. 이로 인해 바람의 기척이, 빛의 자취가, 그림자의 움직임이 겹겹이 흐르는 시간과 함께 다층적으로 담겨진다. 이번 전시에서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한 권」이다. ● 「한 권」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친밀함과 낯섦, 넓이와 깊이, 모호함과 분명함, 머뭇거림과 일렁임 등 이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이 모든 풍경의 결이 겹쳐 있다. 이 작품의 아래쪽에는 드넓은 평원의 지평선 혹은 나지막이 솟아있는 산맥의 능선처럼 보이기도 하는 수평의 선이 존재한다. 이 작품의 안정감과 고요함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이 어두운 녹색은 시선의 무게중심을 아래쪽에 두게 하여 분홍색의 하늘이 무한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돕는다. 「한 권」의 하늘이 그저 가벼움, 혹은 산뜻함만으로 다가오지 않는 까닭은 분홍색에 스며있는 회색이 만들어 내는 진중함 때문일 것이다. 겹겹이, 켜켜이 중첩되는 분홍색과 회색 사이사이로 구름들은 피어오른다. 구름의 기본적인 속성은 무정형과 변화라 할 수 있는데, 「한 권」의 구름들은 끊임없이 흩어지고 모이고를 반복하며 새로운 형상들을 만들어 낸다. 구름을 움직이게 하고, 변모하게 하는 것은 바람이다. 이 작품에는 부드럽지만 광활한 바람이 느껴진다. 거칠지도 거세지도 않은 이 바람은 마치 그림 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머물러 있다. ● 그리고 이 바람과 구름 사이에서 팔랑거리며 한 권의 책이 떨어진다. 책은 유한한 형태를 가지되 무한함을 담을 수 있는 상징적인 사물이다. 이 책의 책등을 유심히 살펴보노라면, '끝과 시작'이라는 책의 제목이 희미하게 보인다. '시작과 끝'이 아닌 '끝과 시작.' 시작과 끝이라고 했을 때, 이 시작과 끝 사이에는 어떠한 기간 혹은 주기의 닫힌 체계가, 어떠한 움직임의 종결 혹은 마침이 존재한다. 그러나 '끝과 시작'에서 중요한 것은 끝이 아닌 '시작', 그리고 끝과 시작 그 '사이'이다. 이때의 끝은 다시 시작으로 이어지기 위한 끝이며, 이는 어떠한 일 혹은 그 움직임이 계속될 것임을 예고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다시 한쪽 문을 열어젖히는 것이며, 아마도 그 문은 더 광활하고 더 심오한 세계로 나 있는 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열어젖힘이야말로 이 작가가 풍경의 결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 고지혜





Vast fabric of humanity


신정원展 / Jungwon julieann Shin / installation.photography 2011_0824 ▶ 2011_0927 / 일요일, 공휴일 휴관



신정원_untitled 3_사진_46.3×46.3cm_2011


초대일시 / 2011_0824_수요일_06:00pm

신한갤러리 역삼 기획초대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공휴일 휴관

신한갤러리 역삼 SHINHAN GALLERY YEOKSAM 서울 강남구 역삼동 731번지 신한은행 강남별관 B1 신한아트홀 내 Tel. +82.2.2151.7684



뒤얽힌 인간사의 복잡미묘한 관계 ● 신정원은 다양한 맥락에서 다루어져 온 인간사의 복잡한 관계를 고찰한다. 전시명인 『Vast fabric of humanity』에서 'fabric'은 작가가 주목한 키워드이다. 작가는 작품의 핵심 단어인 '관계'를 영문으로 표기할 경우 'relationship' 보다는 'fabric'에 더 가깝다고 거듭 강조한바 있다. 언어로 명확하게 표현 할 수는 없지만 단순한 관계로는 부족하다며 거대하게 뒤얽힌 인간사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 너와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나아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되기를 원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신정원의 자기고백적 작업은 정체성에 관한 의문을 시작으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로 나아가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며 겪은 여러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철저히 계산되어 구조화된 공간 속에서 자신이 경험한 관계들을 보여줌으로써 관람객들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한 비밀스러운 공감을 유도하는 것이다. 일명 '찍찍이'라 불리는 '벨크로(velcro)'를 활용하여 설치와 영상, 사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업은 은유적이지만 뒤얽히고 복잡한 인간관계를 극명히 보여주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벽에서 서서히 떨어지는 벨크로는 이러한 관계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드러내는데, 이는 감정의 변화이기도 하며 승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결국 신정원의 작업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관람객들에게 긴 여운을 남긴다. ■ 안선영
신정원_untitled 10, 11_사진_각 46.3×46.3cm_2011
신정원_untitled 6, 7_사진_각 46.3×46.3cm_2011


Keith Mayerson's comment ● Jungwon Julieann Shin's art is a multi-media excursion in transposing her real life and experience into paintings, photographs, videos and installations that have a quixotic appeal in their search for expressing the ineffable. In her choice of Velcro as a material, Jung Won is smartly taking something benign from our material cultural world and transforming it to symbolize codes of gender and ideology, and personal relationships within systems of thought. The same kind of alchemy occurs with all she touches in her art-taking seemingly simple things we see in our everyday existence, and creating out of them objects and installations of great formal beauty that also contain the thoughts, feelings, and ideas of what it is like to be alive in the Twenty-First Century, fighting and striving for eloquent agency in a larger world of capital, ideology, and personal monoliths that need to be transcended. ■ Keith Mayerson

신정원_untitled 5 series_사진_각 46.3×46.3cm_2011
신정원_untitled 4 series_사진_각 46.3×46.3cm_2011


'아무도 내 옆에 없었으면 좋겠다'... 가끔은 사랑 때문에, 아니면 가족, 우정, 사회생활 속에서 겪는 당신들로 인해 당신의 마음은 쉬지를 못한다... 그런 치열한 하지만 고정되어있지 않은 그리고 어떤 시간속의 운명의 카오스안에서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현실 속 인간관계를 나는 벨크로의 공간속 설치를 통해 보여주려한다... 그리고 그 관계속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인간의 감정들을 사진작업을 통해 끄집어내려 노력했다. ■ Jungwon julieann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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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세계 In his World


박경률展 / PARKKYUNGRYUL / 朴徑律 / painting 2011_0824 ▶ 2011_0913


박경률_아버지의 세계 In his Worl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5×145cm_201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09:00am~12:00am

갤러리 현대_윈도우 갤러리 GALLERY HYUNDAI WINDOW GALLERY 서울 종로구 사간동 80번지 Tel. +82.2.2287.3500 www.galleryhyundai.com


아버지의 세계 ●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어떤 사건과 계기를 통해 의미를 갖게 된다. 나는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으로 그것을 이해한다. 기록의 대부분은 직접적인 사건의 묘사가 아닌 드로잉의 형식으로 정제되어 나오고 이런 행위를 통해 그 안에 상관관계를 발견한다. 거기서 얻어지는 규칙들은 내가 이해하고 터득한 세계를 조합하는 방식으로 구축된다. 이것은 사회적 가치들이 만들어지고 통용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합리한 것들을 개인화하여 그 나열을 흐트러뜨리기 위함이다. 「아버지의 세계 」는 가장 작은 사회 단위인 가족, 그중에서도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아이콘과 경험에서 얻어지는 주변의 형태들이 대부분이다. 보편적으로 떠오르는 아버지상과 나의 아버지에 대한 일련의 사건과 기억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섞어버림으로써 한번쯤은 살펴봐야 했던 그(그들)의 세계를 들어다 보고 싶었다. 크리스마스트리(원유추출장치), 깎아 만든 새, 식물, 푸른 넥타이, 세 개의 반지, 텅 빈 신부 복장...꼭 아름답지만은 않지만 그가 보편의 아버지로서 가져야 했던 갈등의 순간들은 내가 읽어야 하고 이해해야 했던 오브제들이 아니었을까? 사회적 관계로서 명명된 딸, 혹은 여성의 입장이 아닌 개별의 인간으로 그의 세계를 다시 재구성 하고자 한다. ■ 박경률
박경률_아버지의 세계 In his Worl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5×145cm_2010~11

In his World

 

 
 

2011.08.24 00:49:19 / Good : 361 + Good

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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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천성명展 / CHUNSUNGMYUNG / 千成明 / sculpture   2011_0826 ▶ 2011_1002 / 월요일 휴관



천성명_그것은 아무것도아니다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1010d | 천성명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826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화~금_10:00am∼07:00pm / 토,일_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스케이프 GALLERY skape 서울 종로구 가회동 72-1번지 Tel. +82.2.747.4675 www.skape.co.kr



천성명의 조각은 실존적 자아에 대한 고민이 작가가 구성한 내러티브를 통해 연극적으로 전개돼왔다. 작가 자신의 얼굴을 바탕으로 한 인물 조각은 서술되는 이야기 구성 방식을 따라 자아가 겪는 내밀한 이야기들을 마치 무대 위에서와 같이 극적으로 드러내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으며 관객과 교감해왔다. 근 몇 년간 그가 선보인 작품은 '그림자를 삼키다'를 제목으로 하여, 2007년, 2008년의 2회의 개인전에 걸쳐 정오, 밤, 새벽에까지 다다르는 시간대별로 구성되었다. 시간이라는 커다란 흐름을 바탕으로 하여, 그 안에는 여러 작은 이야기들이 공간별, 사건별로 펼쳐지는 방식이다. 이후 3년만의 개인전인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그림자를 삼키다'의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사이에서 독립적으로 발생된 단편적 이야기로, 현실적 삶의 편린들에서 비롯된다. ● 현실적 상황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그림자를 삼키다'의 이야기가 한 단락 정리됐던 시간대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전의 개인전에서 동트기 전인 새벽까지의 이야기가 전개된 이후, 그는 해가 뜨고 밝아지며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을 현실적인 장면으로 설정한다. 이로부터 본 전시의 시공간적인 축은 동시대적 시간대를 바탕으로 하여 사회적, 일상적 환경이 공간적 상황으로 자리 잡는다. 전체적인 전시 구성을 살펴보면, 주 전시공간에는 거대한 남자 인물조각이 조각난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으며, 그 뒤로 여자 인물조각이 이 정황을 지켜보고 있다. 파편적으로 나열된 남자의 몸은 쓰러지면서 부서져버린 것인지, 그렇게 도막난 채로 오랜 시간 방치돼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인물의 인상착의를 통해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바지는 벗겨진 채로 셔츠만을 입은 남자의 모습은 힘없이 반쯤은 노출된, 박탈당한 상태를 보여준다. 셔츠에 달린 훈장만이 그가 어느 시대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으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음을 짐작케 한다. 그의 옆에는 손에 쥔 깃발 또한 부러진 채 바닥에 힘없이 늘어져있다. 원래는 높이 세워져 바람에 나부꼈을 이 깃발은 땅에 떨어져 그 권위를 잃어버린 모습이다. 깃발, 훈장 등과 같은 상징적 표식을 지닌 거대한 인물 조각은 작가가 동상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전시 공간에 버거울 정도로 큰 7m의 높이는 전형적인 동상의 크기에서 비롯한다. 견고하고 압도적이었을 이 동상은 이제 부서진 모양새로 전시장 바닥에 흩어져 파편적이나마 겨우 형태를 유지할 뿐이다. 이러한 동상의 형식을 차용하여 작가는 기념물에 담긴 가치, 상징성이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지점을 통해, 과거에 조각적이었던 것이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린 지금의 상황을 동시대적 관점에서 재구성해낸다. 동상 옆에 놓인 확성기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소음은 이러한 상황과는 상관없이 소란스럽게 웅성거리며, 동상이 처한 상황과 현실 사이의 단절감을 공감각적으로 인지케 한다.
천성명_그것은 아무것도아니다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1
천성명_그것은 아무것도아니다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1

쓰러진 동상을 뒤로 하여 전시장 한켠에는 한 여자가 옷을 반쯤 몸에 두르고는 의자에 앉아 이 모든 상황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응시한다. 여자는 손에 실을 붙잡고 있는데, 이 실은 남자의 조각난 몸을 스치며 전시 공간의 기둥에까지 이어진다. 두 조각 사이의 관계는 명확하진 않지만, 여자가 든 실오라기는 남자의 몸을 경계 지으며 전시 공간을 아우르는 새로운 축을 형성한다. 새로 등장한 여자 인물은 기존의 작품에서 보여줬던 인물들에 비해, 현실적인 인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와 연관하여 별도로 구성된 쇼윈도우 공간에 전시된 다른 여자도 일상적 인물의 모습으로, 앞서서 본 여자 인물처럼 붉은 천으로 몸을 반쯤 가린 채 다소 애매모호한 분위기를 드러낸다. 벌거벗지도, 가리지도 앉은 채 몽롱한 표정으로 서있는 여자의 얼굴과 몸은 열병이 일어난 듯 붉은 반점이 울긋불긋하다. 마치 꿈속에서 밤새 투쟁과 갈등을 벌이다 아침에 눈을 뜬 듯, 열병이 난 여자는 골똘히 지나간 상념에 잠겨 있다. 두 여자 인물의 경우 리얼리티가 강해진 인상이지만 몸에 두른 천의 모호한 모양새나 쓰여 진 글귀 등 복합적 내러티브는 오히려 비현실적 분위기를 지닌다. 이들은 과거와 현재, 개인과 사회, 꿈과 현실, 욕망과 좌절 등 상이한 가치관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관조하고, 이를 매개해나가는 중간자적인 존재로 드러난다.
천성명_그것은아무것도아니다_혼합재료_128×30×68cm_2011

전시의 큰 줄기를 구성함에 있어 작가가 동상이라는 구시대적 조각 형식을 차용한 것은, 시대적 환경으로부터 변화하는 가치관을 그대로 수용하고 그 흐름에 휩쓸리기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들을 스스로 점검하고자 하는 자기 성찰적 태도에서부터 비롯한다. 일상적으로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동상이 지닌 조각적, 수공적, 아날로그적인 특징은 현시대에 와 이전의 유물로 인식되며, 하나의 모뉴멘트로서 상징적 기능만을 다하고 있다. 이러한 구식의 양식이 대변하고 있는 조각의 위상은 전시장의 바닥에 쓰러진 남자 인물을 통해 그 가치가 전환돼 보인다. 조각이라는 장르를 기반으로 하여, 회화, 문학, 연극적 요소를 조각 작품의 내외부적으로 관계시켜왔던 작가는 조각가로서의 본연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며, 지금 시대에 있어서 조각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시 공간 속에 펼쳐내 보인다. 이는 급변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변화의 축을 감지하되 동시에 상쇄되어가는 근본적 의미를 고찰해내는 예술가의 운명적 상황과 맞물린다. ■ 심소미
천성명_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열병_혼합재료_143×40×27cm_2011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 계절적 변화 이외에 인간적인 어떤 변화도 궁색한 시골마을 끝자락 / 10년 전 어느 밤 사내는 이곳으로 왔다. //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를 몰랐고 노인들이 대부분인 이웃은 / 세상천지에 사정없는 사람이 있겠냐며 / 지나는 바람처럼 그를 받아들였다. / 그리고 사내는 이곳에서 한동안 아무것도 그 존재를 /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조용히 지냈다. / 하지만 그의 존재가 드러난 것은 그가 출처를 알 수 없는 / 무엇인가를 수집하는 과정에서였다. // 그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정확히 어떤 것인지도 모르지만 / 점차 양이 늘어나면서 사내의 집 마당에는 하나의 덩어리가 생겨났고 / 몇 달이 지나면 그것은 이어져 성곽처럼 변해간다. / 사내는 일정한 높이와 폭을 유지하며 그것들을 연결해 갔고 / 나중엔 정말 반듯하게 각이 세워졌다. // 차 한 대가 지날 수 있는 작은 길을 따라 / 나는 포클레인이 퍼내는 흙먼지 속을 지나고 있다. / 언제까지 지속될 것만 같던 이 마을의 거대한 한적함이란 / 신문에 인쇄된 신도시 발표라는 그 작은 검정 잉크 몇 줄에 / 어이없이 무너져 간다. // 사내의 등 뒤로 아직 무계획한 덩어리들이 올무를 감싸 안고 / 먼지 속에 보였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 처음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몰랐던 것처럼 / 지금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 / 그리고 나의 관심은 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 그가 오랜 시간 지독히 모아온 그 의문의 덩어리에 있다. // 이상한 것은 그가 몇 년 동안 그것들을 수집하는 것은 봤지만 / 그것을 들춰내거나 사용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천성명




성장원 成長元



성유진_찰스장_원주연展   2011_0826 ▶ 2011_0915



성유진_crippledom_천에 콘테_145.5×224.2cm_2008


초대일시 / 2011_0826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12:00am 쇼윈도우 24시간 관람가능

텀갤러리(플레이스막) TERM GALLERY(placeMAK) 서울 강남구 역삼동 834-5번지 라피스라줄리 Tel. +82.2.554.1155 placemak.com/term_gallery



성장원 成長元 ● 이번 전시는 그림을 거는 전시다. 미술의 저변이 확대 됨에 따라 이제 그림은 그림으로, 전시는 전시로서만 존재 할 수 없게 되었다. 작가들은 무언가에 취해 붓을 들고 그리는 행위를 할 뿐이다. 의도적으로 어떤 의미를 담기 위해 각오하고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그려진 작품이 갖는 의미는 존재한다. 작품 안에 메세지를 담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이와 같은 의미론적인 예술 행위가 사회적으로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상당하다. 하지만 본능적인 예술 행위 보다 어떤 목적이나 의미가 앞서게 된다면 예술이 가지는 본질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국내 현대미술의 행보에서 드러나는 문제들 중 하나는 작가들이 이미 정해진 제도 안에서 행하는 시도를 실험이라 하는 것이다. 트렌드에 귀속 되어 그 안에서 소극적인 실험들만 반복할 뿐이다. 관객들은 작품들을 비슷한 스타일로 나누게 되었고 예술이 가진 절대적인 힘은 점차 상실되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그림은 단지 그림일 뿐 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며 회화전을 개최한다. 작품성에 대한 가치 기준의 판단은 몰래 숨겨둔다. 우리의 계획은 들통날 것이 뻔하다. 작가는 그림으로 말하고, 그림은 그림으로 말한다. 그림들 스스로가 내재된 작품성에 대해 발언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가치에 대해 논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예술적 기준과 작품성에 대해 생각할 때가 온 것이다.
성유진_alienation ⅱ_천에 콘테_120×120cm_2006 성유진_alienation ⅲ_천에 콘테_122×122cm_2006
찰스장_TaekownV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펜_145×112cm_2008
찰스장_TaekownV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펜_145×112cm_2008
찰스장_Gundam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펜_145×112cm_2008

LAPIS LAZULI 개관전으로 열리는 『성장원(成長元)』展은 성유진, 찰스장, 원주연을 초대했다. 의인화 된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성유진 작가의 작품에서는 깊은 불안과 통증이 그대로 보여진다. 고양이의 불안한 눈빛과 오브제들의 어색한 배치, 살을 뚫고 나온 팔, 다리의 당황스러움이 보여지는 그대로 이다. 찰스장의 작품에는 유명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한다. 관계자들은 대중화 된 이미지 차용의 의미를 놓고 문제 삼기에 바쁘지만 그는 단지 자주 보여지는 이미지에서 흥미를 찾았을 뿐이다. 따라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창조적 행위는 그가 추구한 재미다. 원주연의 작품은 대체적으로 고요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의 방향과 소극적인 행위들을 집중해서 살핀다면 작가가 그림을 그리면서 느꼈던 그리움과 외로움 등을 전달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본능, 원초적인 힘. 이렇게 우리는 작가들이 가진 본연을 그대로 전달한다. 복잡한 이론이나 의미를 첨부하여 그림 자체의 힘을 방해하지 않겠다. 회화의 담백함으로 승부하겠다는 디렉터의 포부가 관객들에게 심심치 않게 전해졌으면 하는 바이다. ■ 막걸리

"내용이란 어떤 것의 일별, 스쳐 지나가는 섬광입니다. 아주 작은 것이지요. 아주 작은, 내용 말입니다." (웰렘 드 쿠닝)

"외양으로 판단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얄팍한 사람들 뿐이오. 세계가 간직한 수수께끼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란 말이오." (오스카 와일드)

"예술작품이 무엇을 한 것인지 알았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을 말한 것인지 묻지 않았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수잔 손탁)

원주연_조용히 좀 해_장지에 혼합재료_193.9×97cm_2011
원주연_self portrait-give me a hug. please3_장지에 혼합재료_124×96cm_2010 원주연_self portrait-give me a hug. please1_장지에 혼합재료_124×96cm_2010


텀갤러리는 플레이스막의 외부 기획전시 공간입니다. 다양한 상업공간에 기생하면서 지역민들의 문화예술 향유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탄생했습니다.





 


5887


김보리展 / KIMBORI / installation 2011_0825 ▶ 2011_0909


김보리_세탁_전투복, 거울_가변크기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보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클로징 파티 및 작가와의 대화 / 2011_0909_금요일_07:00pm

후원,주최 / [413] 기획 / 김보리

관람시간 / 01:00pm~08:00pm

[413]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4가 31-48번지 41-3.com


나는 공간에 강제징병 되어 5887부대에 머물렀던 2년간의 기억과 상황, 환경을 놓아두었다. 이것들은 문화적, 사회적 충돌을 느껴, 수집 목적으로 내가 있었던 사회 바깥으로 밀어낸 것들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들은 나에게 미적지근하고 잊혀져가는 침전물이 되어 방치돼있다. 전시 되어있는 단편들을 대하는 이러한 태도는 당신의 이야기거나, 때론 당신의 가족이나 친구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김보리_룰_군인 복무 규율_17×26cm_2011
김보리_캐비넷_철제 캐비넷, 메모일기_180×86×36cm_2011
김보리_빡쓰_편지, 사진_8×37×39cm_2011

전시장의 조명을 아주 어둡고 붉게 연출하였다. 관객은 직접 렌턴을 들고 전시장을 구석구석 비추며 작가의 태도를 ‘체험’ 하게 된다. ● 작가는 밀반출을 통해 수집한 사진과 메모, 일기, 편지를 있는 그대로 전시장에 옮겨 두었으며, 전투복 또한 보관했던 상황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또 닿기 어려운 곳에 오브제를 올려두거나 바닥에 내려 두었다. 이러한 조합과 배치는 군대라는 기억에 반응하는 작가의 모습이나 생각, 느낌, 행동을 아주 솔직하고 담담하게 전달하고 있다. ■ 김보리




2011 내일의 한국조각 '기억과 회상'

김인경_안규철_정현展 2011_0827 ▶ 2011_1008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1_0827_토요일_05:00pm

관람료 어른_3,000원(단체 2,500원) / 청소년_2,000원(단체 1,500원) / 어린이_1,500원(단체 1,000원) 만 70세 이상, 장애인 1,2,3급 본인, 국가유공자 다둥이 행복카드 소유자_무료

관람시간 / 09:30am~06:30pm / 월요일 휴관

모란미술관 MORAN MUSEUM OF ART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246-1번지 Tel. +82.31.594.8001 www.moranmuseum.org


기억과 회상 그리고 조각 ● 조각이란 무엇인가? 이 근본적인 물음에 규정된 답은 없지만, 그럼에도 조각의 역사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시도들은 계속 있어왔다. 이러한 다양한 시도들 중에서 공통점을 읽어낼 수 있는데, 그것은 곧 조각의 본질을 공간(space)과 매스(mass) 사이의 관계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조각은 한편으로 공간과 관계하면서, 다른 한편 경험적인 감각으로 파악되는 매스를 갖는다. 이런 점에서 조각은 철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조형예술이다. 조각의 구조 또한 이러한 관계의 미학에서 발견된다. 물론 여기서 구조는 고정된 틀로서 존재하는 체계가 아니다. 조각에서 구조란 조형적 일관성 또는 객관성을 충분히 확보하면서 동시에 작가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삶의 체험을 경험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전통적 조형성을 중시하는 조각이나 개념을 강조하는 조각 또는 설치적인 조각에서 공통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특징이다. ● 조각에서 공간과 매스 사이의 관계와 그 구조성을 설명하는 다양한 관점이 있다. 이 글에서는 문화의 관점에 주목해 보려한다. 넓은 의미에서 삶의 방식으로 이해되는 문화는 정태적이지 않고 역동적이다. 이러한 문화의 역동성은 어떤 한 개념을 얼마든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예컨대, 조각에서 공간은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도대체 '공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뉴톤은 공간을 절대 개념으로, 라이프니츠는 상대 개념으로, 칸트는 선험적 직관의 형식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철학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공간을 이해하는 관점이 달라지면, 매스에 대한 생각도 변하고, 나아가 공간과 매스의 관계 그리고 그 구조를 파악하는 문화의 양상도 변용된다. 한 시대의 조각에는 이러한 문화의 흔적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기에 그리스의 이상미, 중세의 상징과 알레고리, 르네상스의 인간 이해에 대한 새로운 조형성, 근대의 고전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의 이중성, 현대의 조형적 변용과 그 다양성 등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이러한 조각의 문화사적 의미를 '기억과 회상'이라는 문화 키워드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김인경_Silent-Voyage-2006-Karma_혼합재료_350×400×400cm_2006
김인경_Silent-Voyage-2009-몽환포영(蒙幻泡影)_혼합재료_360×250×120cm×4_2009

기억(Gedaechtnis)이란 무엇인가? 흔히 과거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기억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문화학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기억은 일종의 '저장' 개념이다. 그러기에 기억이란 개념은 단순히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적용될 수 있다. 기억은 문화의 장에서 재현될 수 있는 가능성의 '저장고'이다. 물론 여기서 '저장고'란 말은 단순히 창고가 아니라 의미의 발전소에 해당한다. 기억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억의 기술은 단지 '기억술(ars memoriae)'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만약 기억될 수 있는 것만을 기술적으로 떠올리는 그러한 기억술만 남게된다면, 기억이 산출하는 문화적 의미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예술은 기억을 내면화하는 기술이며, 문화를 기억하는 기술이다. 여기서 예술과 기술은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회상'이다. 회상은 기억의 내면화이며, 이를 통해 문화의 의미는 확인된다. 예술은 바로 이러한 기억과 회상의 문화적 생산물이다.
안규철_나선형의 벽(spiral wall)_스케치업 드로잉_가변크기_2011
안규철_식물의 시간-책읽는 나무_퍼포먼스 영상_2011

회상(Erinnerung)이란 무엇인가? 기억 개념에서 '저장'이 중요한 반면, 회상 개념에서 핵심은 개인적 삶의 내면화된 '체험'과 '상상력'이다. 기억의 내면화인 회상은 주관적이면서 체험적인 상상력을 수반한다. 회상은 과거의 현재화이자 동시에 현재의 과거화이다. 회상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문화의 끈인 셈이다. 회상은 단순히 기억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체험과 상상으로 이끌어내는 활동이다. 예술가의 작업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는 기억되지 않은 것들을 다시 기억하고 그 의미를 재현하는 창조적인 작업을 한다. 화석화된 기억은 회상을 통해 생동하는 예술적 현재성이 된다. 이런 점에서 예술은 기억과 회상의 문화적 응축물이다. ● 예술에서 기억과 회상은 상호보완적이다. 기억 없는 회상은 그저 망상, 공상, 몽상, 허상일 뿐이고, 회상 없는 기억이란 무한히 반복되는 기억의 창고로만 남는다. 예술가는 기억과 회상을 통해 이루어질 문화의 모습을 그려내는 작업가이다. 달리 말하자면, 작가란 문화적 기억의 저장고에서 개인적 체험을 투사하는 재현의 활동가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억과 회상의 작업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작업의 주제를 형성하는 문화적 기억과 작가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조형적 감각성이 반영되는 회상 사이에 지속적인 갈등과 긴장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갈등과 긴장이 한 시대의 문화의 의미를 읽어내는 데 간과해서는 안될 요소이다. 예술은 기억과 회상의 교차로에 있는 문화의 정거장이기 때문이다.
정현_무제_철_161×98×82cm_2008
정현_쇠나무_철_960×60×60cm_2009

이번 2011년 『내일의 한국조각 - 기억과 회상』전은 한국 현대조각사를 고찰한다거나, 현재 진행 중인 현대 조각의 양상을 점검해 본다거나 또는 미래의 조각의 향방이 어떠할 지를 예견해 보는 그런 의도에서 기획된 전시는 아니다. 물론 이러한 의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시의 주안점은 '기억과 회상'이라는 관점에서 조각의 문화적 의미를 생각해 보는 데 있다. 여기서 문화적 의미란 바로 조각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흔히 '조각의 위기'를 말하곤 하지만, 엄밀히 보자면 이는 단지 조각이 갖는 조형적 문제라기보다는 조각의 문화적 문제이다. 문화를 기억하고 회상하는 예술로서의 조각이 갖는 위상이 과연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을 모색하기 위해 기획된 전시가 이번 『내일의 한국조각』이다. ● 이번 전시에 참여한 김인경, 안규철, 정현은 특히 1980년대 이후 전개된 한국 현대조각의 흐름에서 주목할 만한 조형미학을 보여준 작가들이다. 조각적 재료의 다양성과 조형적 형태의 실험성 그리고 조형적 상징성과 개념을 견고하면서도 자유로운 조형적 힘으로 구사해왔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세 평론가들의 글은 각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분석적이면서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언급하고 싶은 한 가지는 세 명의 작가들이 조각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예술의 의미를 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데 매우 적절한 조형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일의 한국조각"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형식에서 새로운 조각이 아니라, 문화적 함의를 담은 조각에서 드러날 것이다. 내일의 한국조각을 묻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번 『내일의 한국조각 - 기억과 회상』전은 조각과 문화의 관계 그리고 이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조각의 의미를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 임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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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is your destination? : 당신의 행선지는 어디입니까?

김정은展 / KIMJUNGEUN / sculpture.installation 2011_0831 ▶ 2011_0905


김정은_Where is your destination?_지도 책_31×46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616i | 김정은展 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83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2층 제2전시장 Tel. +82.2.734.1333 gana.insaartcenter.com


#1. Where is your destination? : 당신의 행선지는 어디입니까? ● 도시는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복잡하며,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거대한 속도에 의해 도시의 풍경내부는 늘 현재진행형이다. 내가 불과 몇 달 전에 20여 년 살았었던 '서울'은 빠른 속도만큼이나 움직임을 대변하듯, 공간구조의 조직, 또한 꽉 짜인 형태로 맞물려 있다. 어디를 가나 공간이 꽉 채워져 있고, 이공간의 부피는 빈틈없이 쌓여져, 더욱 복잡한 구조에 구조를 더한 복수의 공간으로 가득한, 중첩된 공간의 형성이 된다. 여기저기, 여러 방향으로 겹겹이 둘러 쌓인 길들은 그물망처럼 복잡하게 연결되어있고, 작품의 전반적으로 보여지는 구조로서 무엇보다 도시의 습성을 표현하고자 함이다. ● 나는 지도 책 이라는 오브제를 변형하여. 도로만 남긴 마치 얽혀있고 복잡한 형태의 지도를 제작하였다. 각기 다른 배열과 구성을 통해, 길들을 한 프레임 안에 가득 채워, 혼합된 풍경들을 표현하였다. 지도 책을 펴는 순간. 어떠한 장소도 목적지도 찾지 못하는 공황상태를 유도 하거나, 중첩된 길의 구조는 마치, 시각적으로 복잡함 속에서 연결되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사라지고 없어진 구조로 구성된 패턴으로 시각화 하였다.
김정은_Where is your destination?_green road series 김정은_a, Where is your destination?_green road 1_지도 책_31×22cm_2011 김정은_B, Where is your destination?_green road 2_지도 책_38×29cm_ 2011 김정은_c,Where is your destination?-green road 3_지도 책_38×27cm_2011 김정은_d, Where is your destination?-green road 4_지도 책_26×22cm_2011

「Where is your destination?-green road」시리즈 에서 보여지는 작품은 길만 오려낸 지도 책 프레임 안에, 수놓아진 그린로드 (: 녹색 길) 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길은 만들어진 길로서, 이는 사람과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아닌, 순수 녹색의 길로, 자연의 길을 의미한다. 이 길은 특정한 공간을 서로 연결한다.
김정은_Where is your destination?-waving the green road 1_지도 책_79×110×27cm_2011 김정은_Where is your destination?- waving the green road 2_지도 책_88×150×31cm_2011
김정은_Where is your destination?-connected green space _오려낸 지도, 철 프레임, 반사거울_124×100×35cm_2011

「Where is your destination?-connected green space」는 도시 속에 자리 잡힌 공원, 녹지공간만 남겨 오려낸 후, 공원과, 녹지공간을 서로 연결 지어, 하나의 통로로써 그린로드를 만든다. 이런 지도의 겹침은 하나의 복잡성을 띈 무늬로 시각화되고, 공간과 공간 속을 부유하는 하나의 띠처럼, 막연한 기대감을 주는 통로로 작용하여 그린로드가 형성된다.
김정은_disappear map_트레이싱모눈종이, 연필드로잉, 지우개, 라이트박스_가변설치, 60×80×40cm_2011

# 2.「Where is your destination? _ green landscape」 ● 여러 권의 지도 책을 수집해 해체하는 과정 속에서 눈에 띄는 「녹색의 공간」은 펼쳐진 지도 사이사이 "공원, 녹지공간, 그린벨트 등" 명명된다. 도심의 기능과 다른 기능으로 도시의 한 곳을 자리잡고 있으며, 개발이라는 경계 위에 놓여져 있다. 나 역시 도심에 살다 그린벨트(개발이 제한된 구역)의 경계 위에 거주하게 되면서 경계 위에 풍경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는 도시와 외곽 변두리의 경계에서 물밀듯이 진행되는 도시화와 농경의 삶이 혼합된 상황을 마주 보고 있다. 흙에서 아스팔트로 그린벨트에서 재개발지역으로 나의 이동 또한 도시화가 되어가는 풍경이 된다. 도심을 벗어난 외곽지역의 갖가지 생명의 모습은 질서화되고, 고정화된 건축물들을 맞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경계 위에 놓여진 오브제를 수집한다. 주로 쓸모가 없어 버려진 모종판들과 모종판 거치대, 조립식 비닐하우스 들이며 소외되고 버려진 오브제들은 재생되어 하나의 녹색풍경으로 재현하고자 한다.
김정은_building growing_모종판, 비닐하우스 거치대, 비닐, 포맥스_47×63×220cm_2011

서울은 고도의 지난 역사와 도시 팽창이 지속되고, 여러 곳의 다른 성격의 지역성을 구성하는 서울은 복잡한 레이어로 구성된 곳이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된 도시의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지리정보(지적도)를 수집 한 후, 5년을 주기로 현재까지의 변화무쌍한 길의 레이어들을 합쳐져, 시간성이 쌓여진 하나의 지도를 보여준다. 이는 관람객 스스로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설치 작품으로, 관람객 자신 스스로가 연필로 그려진 길들을 지우개로 지워나가면서, 이 과정을 전시기간 내내 진행시켜 길이 없던 그린공간이 드러나게 된다. 이는 길이 생겨나기 전에 그린공간을 돌아간다는 의미를 표현 하고자 한다.
김정은_모종블록_모종판, 모종거치대, 지도, 폼보드_가변설치, 77×93×63cm_2011

비닐하우스는 계절과 상관없이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고 다양한 사물과 채소를 생산하는 보편적인 비닐하우스의 개념을 도입하여, 무차별적 개발로 팽창된 도시가 확산되어가는 특정도시지역의 정착단계를 비유하였다. 녹색의 싹이 움트는 특징을 바탕으로. 모종판 속 지도(개발제한구역)위에 펼쳐진 높게 솟은 건물, 공장, 철골구조물로 구성된 도시의 녹색 블록들은 싹이 솟아나는 형태로 표현된다. ● 모종판 안에는 중첩된 도로들과 그 도로를 가로지르는 초록형태 덩어리를 볼 수 있다. 지도 책을 해체하는 과정 속에서 오려내고 남은 도시의 블록들 중, 초록으로 구성된 지역의 블록들로 구성되어 만들어진다. 복잡하게 연결되고 중첩된 하나의 그물망처럼 형성된 도시의 길 위를, 차단시키는 바위산의 형태로 제작해 길을 가로막고 있는 형태를 제작하였다. 모종판의 거치대위에 올려진 모종판 하나하나 새롭게 구성되어, 모종판 위에는 낯선 지형이 만들어진다. 마치 벌판 위에 가져다 놓은 바위 와 같은 건축적요소의 단상을 출발점으로 해서, 도시 주변으로 확장되어가는 현존하는 공간의 논리를 무시하는 상황을 표현하였다. 모종판 위에 놓여진 지도를 해체하고, 중첩 시킨 후, 모종판 하나하나를 조립하는 과정 속에서 모종블록들은 비논리적인 공간으로 구성된다. ■ 김정은




Lunar Rainbow

조윤선展 / CHORYUNSUN / 趙倫旋 / painting 2011_0831 ▶ 2011_0918


조윤선_Lunar Rainbow110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거즈, 실_45.5×53×6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0704c | 조윤선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83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월~토요일_10:30am~06:30pm / 일,공휴일_11:30am~06:30pm

갤러리 도올 GALLERY DOLL 서울 종로구 팔판동 27-6번지 Tel. +83.2.739.1405 www.gallerydoll.com


함께하는 미학 -컨텍스트(Context) 와 그라데이션의 의미정황(Con-text) ● 작가 조윤선은 실로 천을 짜듯이 색실 하나 하나를 캔버스 위에 붙여가며 알록달록한 색채를 만든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나와 세계와의 연결"이며,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라고 정의한다. 실을 '교차시키는 행동'을 통해, 작가는 외부와 관계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이 천을 작품 은유적 의미이자 본질적 의미로 인식하며, 자신의 작품을 씨실과 날실이 서로 짜서 천을 만들 듯이 삶의 이야기를 그린다고 설명한다. 그는 헤어짐, 다양한 삶의 상처와 치유, 삶의 이야기를 말한다. 삶의 이야기나 그 속의 정서는 마치 실이 천을 만들거나 나무가 성장하며 나이테를 만드는 것 같이 나타난다. ● 여기서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며 정황(context)를 제안한다. 정황의 어원적인 의미인 '실이 짜내는 천'의 의미가 직접적으로나 비유적으로 작가의 의미를 형상화한다. 빨강이나 주황, 노랑, 파랑 등 구체적인 사물을 지시하지 않는 추상적인 색 선으로 만들어내는 '아치형'과 유사한 색면들이 때로는 원형의 의미(半-圓形)를, 때로는 원형적(原型(arch-)의 의미를 제시한다. 둥근 원형(圓形)은 방추형이나 동그라미, 반원형, 볼록한 캔버스 형태 등 다양한 곡선으로 변환되어 다양화된다. 이들 형태들은 조형적인 형태로 직접적으로 시각화된다. 이에 반해, 원형적(原型(arch-)의 의미는 무지개나 선과 색의 의미 등을 해석함으로써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작가의 작품에서 아치를 통해 우리는 아키타입이나 아케올로지와 같은 'arch-' 로서의 원형의 해석적 의미를 제시한다.
조윤선_Lunar Rainbow110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거즈, 실_42×42cm×3_2011

작품에서 나타나는 색 하나를 자세히 보면 여러 가닥의 색 선들이 촘촘히 쌓아져 하나의 색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실 하나가 혼자 독립적으로 단색을 발하기보다 여러 색들이 모여 하나의 색처럼 인식되어 정황(CONTEXT)의 의미를 제시한다. 사실 정황이란 "섬유를 짜 천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고 미술적으로 1980년대 이후로 포스트모던 시대에 서구에서 등장한 미술 경향으로서, 사회적 정황이나 인류, 문화, 정치, 경제 등 다양한 정황을 제시하거나 관계를 맺는 예술을 의미한다. 이러한 예술은 순수주의 모더니즘 미학을 반성하며, 실제 상황(circonstance)이나 실제 세계 (reality)와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정황 예술의 예를 볼프강 라이프가 꿀벌의 노란 화분(花粉)을 재료로 제작한 사각형이 단순한 추상작품만이 아니라 자연과 지구 환경의 문제를 제시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작가 조윤선 역시 무지개 빛 아치들의 추상성을 통해 단순한 추상만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나 만남 등 개인적인 삶의 정황에 중점을 둔다.
조윤선_Lunar Rainbow1104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거즈, 실_97×130.3cm_2011_부분

만남은 이분법적인 자아와 타자의 관계로 구분된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나-너의 구조를 더 이상 분열적으로 나누지 않고, 항상 실과 색으로 다른 존재와 조화와 섞임을 목적으로 하였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작가의 미학은 정황적 포스트모더니스트들처럼, 사회나 인류학적, 인간적인 성의 문제 등에 대해서 행동적이거나 적극적으로 참여적이거나 현장적인 의미들을 강조하기보다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즉 사람 사이의 문제(人-間)의 정황을 제시하는 데 집중한다. 이러한 인간 관계를 주제의 정황으로 이해하며, '서로 연관된 의미'를 작가는 제시한다. 쟝 뽈 사르트르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실천(pratico-inerte)'라고 하며, '인간들-주체들이 연결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독립적으로 개별적으로는 무가치하고 움직일 수 없는 존재를 설명하며 인간의 행동과 삶은 이러한 주체들이 '연결'(correlat)되어야 활성화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 개념에서 상황적, 정황적인 맥락 (context)의 주된 요소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녀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이라고 하겠다. 연결은 인간의 소소한 문제를 '작은 문제'로 버려 두지 않고, 작품의 내용적 텍스트로 들여온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추상의 길' 즉 구체적인 형태들이나 사건을 버리고 색으로 승화시켜 화려하고 단아한 모습을 보여준다. ● 작품을 자세히 보면 작품에는 두 정황이 나타나는데, 첫째는 미술적 정황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정황이다. 이들은 두 정황, 하나는 작품적 정황과 다른 하나는 작품 외적 정황 (두 실제 context)을 연결하는 것으로 앙드레 까데레의 설명이 생각난다. "[나는] 작업을 하고, 그것을 보여준다. 이 행위는 완벽하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일상의 삶의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며, 일상 활동은 파악될 수 없는 것으로 기술된다"는 설명처럼, 삶의 의미들 속에 작품은 부분으로 등장하며 두 정황 사이에 연관성을 강조한다.
조윤선_Lunar Rainbow1106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거즈, 실_72.7×90.9cm_2011

"색의 결합은 한 사회이자 나의 인생이다."(작가 노트) ● 작가는 색 역시 주제의 정황, 천을 짜듯이 여러 실들로 구성한다. 상징도 구체적인 오브제나 대상이 다른 것을 의미하는 구조를 갖는다 점에서 매우 정황적인 측면이 있다. 이러한 색의 정황 위에 "같은 색의 실이라도 주변에 어떤 색과 교류하는지에 따라 그 색의 존재성과 전체적인 분위기가 달라진다"(작가 노트)는 단일한 색이기보다는 항상 이웃과 관계하는 '코이노니아' (공동체적 공동의 koinos)의 의미가 있어서, 상호 참여하여 유기적인 시각을 갖는다. ● 여러 색들이 모여 하나의 색을 형성하듯이 연합되어 대표되는 색은 다른 무수한 색들과 연합하며 색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렇게 여러 개가 한 번에 보이는 것이거나 아니면 다른 것들과 함께 하나를 구성되는 것은 상징(symbol)의 어원적인 의미(sumbolon)를 연상하게 한다. 상징의 어원은 sumballo라고 하여 '같이 함께 제시된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함께 던진 것, 그리고 하나로 연합하는 것, 하나로 모인 것, 서로 밀접하게 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바로 이 점이 실 선들로 이뤄진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는 '밀접한 관계'와 '같이 함께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함께 있지 않으면, 단독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이다. ● 그렇게 일군의 색들이 같이 하면서, 색들이 갖는 '밀접한 관계'는 작가만의 상징적인 의미들을 구성한다. 이 밀접하게 관계 맺은 색 선들은 작가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습관적으로 잡지나 사진을 볼 때 색을 먼저 받아드리고, 색으로 기억하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색은 사건을 대신하는 기호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발견한다. 노랑은 작가의 좋았던 기억들, 예를 들면 누군가가 작가에게 용기를 주었을 때의 기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보라는 우연적으로 좋았던 사건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러한 색은 물론 다른 색과의 배열 속에서 다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실제 많은 사건들은 다양한 색 사이의 관계로 형상화되며, 지극히 개인적인 색의 상징으로 형성된다.
조윤선_Lunar Rainbow1110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거즈, 실_80×80×12cm_2011_옆면

그라데이션 ● 색들은 미세한 색의 변화, 즉 그라데이션으로 확장되며 그려진다. 이러한 색의 배열은 편안함이 있고 다른 존재나 색과의 연결이 강조된다. 색 실 하나는 단일 색을 가지지만, 이것이 함께 있어서 색을 형성할 때, 경계가 애매한 존재가 된다. 이 구성은 하나의 색 실이 다른 (타자) 실에 붙어 다시 색을 형성한다. 이 때 그라데이션을 형성하는 것 역시 여러 이질적인 상황, "좋은 일이거나 나쁜 일 등 삶의 연속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건들을 풍부하게 상징하는 색으로"(작가 노트) 삶의 존재를 형상화하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라데이션은 일종의 '전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부동(Boudon)은 그라데이션이 진행이나 전개(progression) 라고 지적한다. 이 개념은 사회학적인 용어였으나 우리의 미학적인 개념으로도 색채의 문제에 적용할 수 있어서 여기서 제시하고자 한다.
조윤선_Lunar Rainbow111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거즈, 실_52×102cm_2011

부딪힘과 조화 (아치) ● 점증적으로 이어지는 색상들은 그라데이션의 방법으로 화면 속에서 온유한 색의 조화로 보여주면다. 그러나 작품 「Lunar Rainbow 1101」에서는 반대의 색이 대조적으로 제시되는데, 이를 '반대의 역동' (dynamologie du contre)이라 말한다.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나며 부딪치는 모순과 반대된 관계 즉 그 사건들 사이의 일들 사이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예술작품의 실행이 항상 저항에 접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어떤 상황에서 "물질의 저항이나 물질이나 불쾌한 심리적 조건으로부터 나오는 저항, 적대적으로 수용되는 조건에서부터 나온 저항에 접함"을 붉은 색과 반대된 파란색의 접합으로 만남을 의미하며, 작품은 때로는 물질의 만남에서, 때로는 불쾌한 심리적 조건에서 발생하는 저항 등에서 이러한 '반대의 역동학'을 나타낸다. 그렇다고 이것은 작가에게서 반대되는 것으로만 끝까지 남아있는 것은 아니라 '조화와 대화'의 관계 속에서 만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작가는 분명 자기 중심적인 독존적 미학적 입장을 갖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기 안에서 타인을 안고 다름을 포용하려는 모습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앞의 정황이라는 개념에서나 색의 개념에서도 그리고 색의 그라데이션적 배치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다른 색의 그라데이션은 무지개나 달무리의 또 다른 색이자 은유로 등장한다. 무지개는 노아의 방주 시기, 대 홍수 이후, 하나님의 약속으로 무지개의 의미로서의 아치를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이는 구원의 전조적인 약속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또 다른 빛의 모습이고 색이 모습이다.
조윤선_Lunar Rainbow1114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거즈, 실_97×163cm_2011

원형(原型, arch-) 과 원형(圓形)의 수사 ● 작가는 이러한 의미를 달무지개(lunar rainbow)로 이해하여, "밤하늘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듯한 포근함과 편안함을 주는 달빛처럼 그 느낌의 색을 화면에 담고 싶은 작은 욕심을 내어본다"고 설명한다. 작가가 형태나 색을 사용하는 의식 기초에서 기독교적인 생각과 유사한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곧 회화를 생명의 공간이요 치유의 공간으로서의 조형적인 의미들을 파악하는 선한 목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형태는 반원의 모양으로 등장하는데, 이 의미는 무엇인가? 건물 안의 하늘을 표현하는 도움의 공간은 공학적인 우수성을 나타내는 아치이면서도 동시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창조자의 사랑을 형상화시키는 아치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이 공간의 평안 속에 하나의 공간으로 안아 주며, 그 안에 있는 존재들을 관계 맺고 조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아치, 원형, 무지개적 정황 속에서 작가는 원형의 나이테가 시간의 작가의 노동의 시간의 중첩과 전개, 진행과 동시에 색의 중첩과 제시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 아치나 볼록한 형태를 작가는 '둥글게 튀어나오게 하여 임산부의 배처럼 편안함, 부드러움, 모성, 온화함'을 느낄 수 있는 모양이라고 하여 여성성의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굴곡의 형태에서 matrix(모태)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이 부드러운 형태는 바로 그러한 점에서 원형적(原型(arch-) 형태이면서도 원형(圓形)의 확장이다. 이 원형의 형태는 아치가 회전하거나 확장되면서 형성되는 것으로, 작품에서는 회전하는 과녁처럼 놀랍게도 관람객을 원형의 중심으로 빨아들인다. 회전에 의해 획득된 화면처럼 작품의 중심성은 작가에게서는 집중을 통하여 치유의 효과를 형상화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름다운 색의 조합으로 치유하고 있으며, 또한 어둡게 썩어가는 시각 환경에서 '함께하는 색'의 의미를 보여 줌으로써 지나치게 개인화된 사회에 '함께 의미하는 존재', '타자와의 연합을 통한 상징'의 미학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는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 강태성




지상최대의 섹슈얼리티-예고편

오종원展 / OHJONGWON / 吳鍾元 / drawing.installation 2011_0831 ▶ 2011_09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오종원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83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팔레 드 서울 gallery palais de seoul 서울 종로구 통의동 6번지 Tel. +82.2.730.7707 www.palaisdeseoul.net


1. 내 기억의 단편들 중에서 그림자를 보게 된다면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 많은 부자관계가 그럴지 모르겠지만 나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썩 가깝지 않았는데, 사실 난 그다지 반항적이거나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불태우는 십대를 보낸 게 아니었음에도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늘 가슴 한편으로 불편함을 안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내 아버지는 동화책이나 교과서에서 배워온 이성적 가정의 아버지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고마운 분이었지만, 반대로 하나의 힘을 가진 개체로서 자신이 지켜야 할 것에 상처를 주는 모습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물론 현재는 바래왔던 이성적 가정을 회복하며 그 기억들은 지나간 일이 되었지만. 이를 회고하고 기록하며 보여주는 행위는 실로 부끄럽고 끔찍하기 그지없다.
오종원_자유의 여신상을 세우는 과정 The process which builds statue of liberty_ 종이에 목탄과 파스텔_116×91cm_2011
오종원_LU1_코뿔소와 싸우다 LU1_With the Rhino fights_디지털 프린트_46.5×70cm_2011

2. 2009년, 한 여고생이 윤간당한 후 방화로 살해당한다. 주모자가 재력가의 미성년 자제란 풍문 아래로 형량이 조절 가능한 장기 5년, 단기 4년형이 선고된다. 많은 이들이 악질적인 수법에 비해 솜방망이 처벌이라며 반발적인 모습을 보이나 정작 그 후로 이 사건은 부각되지 못한다. 2011년, 한 시나리오 작가가 자신의 자취방에서 생활고로 숨진다. 밥과 김치마저 구걸해야 했던 그녀의 사정에 어떤 이들은 안타까움을, 어떤 이들은 그 상황이 되도록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음을 어리석다 표현한다. 옳은 것이란 과연 존재할까. 나로선 옳다는 게 어떤 현상과 관계로 성립되는지 점점 무뎌지는 것 같다. 더욱이 계층과 환경에 의해 인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룬 부르디외의 이론을 알게 되면서 강하게 느껴지는 그 것은, 그저 사회라는 군집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사회라는 이름으로 면죄를 받는다는 것이다. 사실상 보이는 것은 피해를 입은 자와 가해를 한 자, 그리고 그것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무엇인가로서 자칫 염세적으로 느껴지는 현상 뿐이었다.
오종원_어느 날 몰아닥치다 It descend when oneday)_종이에 목탄_80×150cm_2011
오종원_For suddenly, I saw you there_단채널 비디오_00:04:45_2011

3. 어느 날 우연히 공사현장의 크레인을 보게 되었다. 우발적으로 나는 그 거대한 크레인을 바라보며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첫째가 질투, 그리고 분노였다. 무서운 줄 모르고 하늘을 찔러대는 이 사회의 강한 상징이며 흡사 거대한 남근처럼 느껴졌다. 강한 남성상이다. 끝없이 올라가는 그것에 비해 내 자리는커녕 흔적조차 남길 수 없는 나는 상대적으로 작은 남근을 가진 체 움츠리고 쪼그라들었다. 그리고선 한 편에 자라나는 또 다른 감정을 음미하는 것이다. 저것이 싫고 미움에도 불구하고 그 거대함에 매료된다. 쭉쭉 뻗어 올라가는 마천루의 실루엣을 보며 어떤 의미로선 격렬한 오르가즘을 연상시키고 나는 그것을 심히 탐내고 마는 것이다. 그 것의 이름은 아마 동경인 것 같다. ■ 오종원





사랑 지나서 싸랑 Love beyond love

홍인숙展 / HONGINSOOK / 洪仁淑 / painting.printing 2011_0831 ▶ 2011_0909


홍인숙_마음의 그림자_종이 프린팅, 드로잉_120×10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홍인숙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831_수요일_06:00pm

나무화랑기획 옴니버스 내러티브 - 삶. 사람. 사랑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4층 Tel. +82.2.722.7760


1. 폭_우_가_하_늘_색_을_다_섯_번_쯤_바_꿔_놓_으_니_사_람_의_저_녁_이_다_ 좋은 날씨 궂은 날씨 가릴 것 없이 저녁의 안은 어둡다. 해서 사람들은 저녁의 밖으로 나와 촛대를 올리는가. 촛불 아래 사람의 얼굴은 예뻐 보인다. 달 같다.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달! 어디 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촛불 아래 사람의 얼굴이 예뻐 보이는 이유는 어둠을 보여주지 않는 달의 뒷면이 고스란히 배어있기 때문이다. 삶의 생생한 실상이 마음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사람의 밤에는 먹고 사는 얘기부터 사랑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이별하는 얘기까지 살아보려고 애쓴 하루의 상처가 그대로 남는다. 어떤 날은 별똥별이 밤을 보태기도 한다. 그게 바로 지금이다. 1분 발언대에 오른 거리의 시인은 누구를 찾는다. 누구란 대체적으로 년이나 새끼라는 돌림이름을 갖는다. 오늘은 十八年을 찾는다. "十八年아 너 어디 있어" "빨리 안 나와" 귀청이 떠나갈 듯한 폭음 뒤에 이제 다 끝난 건가 싶은 짧은 적막이 몇 번이고 계속이다. 달아난 애정을 찾는 것인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힘들고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려는 게 누구나의 삶이 듯이, 거리의 시인은 눈물에 의지하려나 보다. 눈물이 폭우다. 인간의 성장 취향과 생활의 상상력까지 짐작하게 하는 十八年이라는 단어에 어제의 교육을 다시 확인한다. 선생님은 욕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하셨다. 머리로 안다는 것이 때론 속수무책일 때가 있다. 거리의 시인이 낭송중인 "十八年아 너 어디 있어" "빨리 안 나와" 꼴랑 두 줄의 단시가 사람의 삶을 살살 흔든다. TV에서 보도되는 오늘의 뉴스보다 사람의 밤을 불편하게 한다. 그래서 알게 된다. 불편함만이 정신을 깨어있게 해준다는 것을... 그 러 할 때 가 장 어 두 운 밤 의 위 로 그 게 예 술 의 사 회 적 싸 랑 이 었 으 면 사 람 들 은 정 말 좋 겠 다.
홍인숙_마음의 그림자_종이 프린팅, 드로잉_120×100cm_2011
홍인숙_마음의 그림자_종이 프린팅, 드로잉_120×100cm_2011

2. 비_ 를_ 품_ 은_ 바_ 람_ 의_ 정_ 체_ 는_ 폭_ 우_ 일_ 것_ 이_ 다_ 그걸 어떻게 알았냐하면 말라비틀어진 나무색이 후두둑 짙어졌기 때문이다. 새들의 몸이 보인다. 쉬고 있는 걸까. 앉아 있는 걸까. 삶은 꼼짝도 못하는 어리둥절함 움직이면 그것이 곧 죽음이라했던가. 이랬다 저랬다 왔다 갔다 이럴까 저럴까 아니다 그렇다 날마다 마주치는 소소한 근 심 과 걱 정 들... 걱 정 들... 어머나! 그런 근심걱정 따윈 토끼나 줘버리라며 아이들의 물장난 소리가 헤엄쳐간다. 아! 최후의 낙관. 아 이 들. 그대들이 옳다.
홍인숙_사랑 지나서 싸랑_종이 프린팅, 드로잉_108×150cm_2009
홍인숙_엄마의 귀가_惠骨朴我地 종이 프린팅, 드로잉_125×100cm_2011

3. 비_ 를_ 품_ 은_ 바_ 람_ 은_ 그_ 속_ 을_ 알_ 수_ 없_ 을_ 때_ 가_ 좋_ 다_ 그저 이렇게 몸을 내놓고 아주 느긋하게 바람의 안무를 받아들인다. 반쯤은 너에게 반쯤은 나에게 몸을 틀어 회전시키는 질서가 일방적일지라도 숨겨진 내면을 다시 배치시켜주는 이 두려움이 싫지만은 않다. 뭔지 모르겠지만 나와 내 앞에 있는 이 사람과 이 사람 뒤의 저기 넘어 까지를 다 그리고 싶었는데, 하나의 어떤 것으로 뭉쳐 그리고 싶었는데, 그게 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밭에 가보니 비가오더래 아이고! 무서워! 혜골박아지惠骨朴我地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알게 된다. 삶을 그 리 고... 싶어 하는 지 금 을... ■ 홍인숙
홍인숙_엄마의 귀가_惠骨朴我地 종이 프린팅, 드로잉_135×100cm_2011
홍인숙_눈이 녹는 이유_我父地 바느질_84×57cm_2011

산다는 것만큼 불명료한 것이 있을까?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한정되지 않은 삶에서 말이다. 매일을 쳇바퀴처럼 단순하게 반복하더라도, 산다는 건 늘 새로운 경험을 발생시킨다. 사건과 현상이 일어나고 소멸하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감정과 생각도 끊임없이 생성되고 사라진다.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많은 부분을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사회와 마주한다. 일상이다. 우리는 그 일상에 적응한 듯 살지만 그 이면엔 비일상적인 꿈·기억·희망 등을 저마다의 마음속에 내밀하게 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이자 무대인 사회는 이런 개인들의 은밀한 세계에는 관심이 없다. 사회를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인자가 개인이지만, 전체인 사회는 이런 개인의 유기적인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구조나 체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시스템은 예측과 증명과 재현이 가능한 합리적 팩트Fact만을 요구한다. 실질적이고 실리적인 관계인 비즈니스처럼 숫자와 같은 객관적 기호들의 명증성이,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개인의 관념이나 상상과 같은 현상의 상부에서 작용하기에 그렇다. 이렇듯 사회가 중심이 되는 현대인들의 삶에서 사람들은 자기만의 공간으로 일탈을 꿈꾼다. 자유·희망·추억·기원·사유…등의 비가시적인 심리와 정서의 세계로. 예술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런 일탈의 거의 유일한 기제라 하겠다. 홍인숙, 배남경, 이서미 세 명의 작가의 개인전으로 구성된「옴니버스 내러티브 - 삶, 사람, 사랑」전은 이들의 삶의 현장에서 발생되고 발견되는 개인적 체험과 기억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작업 프로세스를 거치면서 특화된 감성과 자기진술의 형식을 거쳐, 다시 '우리'라는 사회로 귀환하며 관객에게 자신만의 언어로 말을 건넨다. 일상적 문법으로부터 일탈한 이들 고유의 시각언어가, 관객과의 만남으로 다시 보편적인 삶의 이야기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 전시는 '삶', '사람', '사랑'이란 보편적 의미가 공통분모가 되어 내용의 축을 이룬다. 삶의 주체가 사람이고 또 사람들의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사랑이라는, 어찌 보면 통속적이고 상식적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누구나 겪었을 법한, 누구나 기억해낼 수 있을 법한 에피소드들이 작업의 출발선이다. 그러나 그 일반성에서 일탈하는 감성과 사유가 구축한 각자의 형식과 목소리는 그리 일반적이지 않다. 작품들이 대상이나 현상의 묘사나 재현이 아니라, 삶과 기억과 마음의 작가적 진술의 층위에서 표현되어진 것이라 그렇다. 상황의 설명이나 해설이 아닌 자신의 마음의 상태에 대한 진술로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전시를 통해서 확인해야 할 지점을 포착할 수 있다. 단순한 기록commentary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발화發話된 세계에 대한 시선, 구사되는 시각언어의 표현방식, 그리고 작업행위를 통한 삶에 대한 태도 등이 빚어내는 결과로서의 내러티브와 이미지를 좀 더 깊숙이 수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 한편 이 전시는 삶이라는 공통된 소재와 수사적 주제를 가진 단체전이다. 그러나 다시 개별로 분절해 보면 각 작가마다의 고유한 시각과 태도가 서로 다르게 제시되는 독립된 개인전이기도 하다. 개인전의 기준에서 보면 각 작가의 스타일과 어법이 독특하게 구축된 상태라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체전과 개인전의 기능과 속성을 오버랩 시키는 전시구조를 택한 것은, 옴니버스라는 전개방식이 주는 차이점/공통점의 드러냄을 관객이 수용하는 방식의 자연스러움 때문이다. 전시를 통한 작품들의 내용전개와 전달방식은 기승전결이나 인과율처럼 단순명료한 수직의 구조가 아니다. 옴니버스는 각 작가의 단편들을 수평적인 병치와 병렬로 제시함으로 발생하는 차이/공통점을, 관객이 스스로 느끼고 인지하며 주제를 찾아가는 소통과정의 유효함이 도드라지는 구조다. 따라서 전시는, 전시주체인 기획자에 의해 가공되고 제련된 통일감에서 벗어나, 각 단위 개인전 사이 행간에서 자유로운 감상과 인식의 통로를 만들어 줄 것이라 여겨진다. 한편 전시의 진행과정이나 소통과정에서, 예측할 수 없이 즉발적으로 발생하는 우연과 돌출되는 변주들도 작가와 관객 모두에게 생각거리를 만들어 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우 기획자가 준비단계에서부터 의도하는 전시공학적으로 잘 짜여지고 재단된 범주를 넘어서는, 또 다른 전시 개념과 의미들의 생성이 그래서 가능하다. 가공하지 않은 날 것의 상태에서 부대끼며 발생하는 혼돈을 관객들은 능동적으로 수용함으로, 틀에 박혀 있는 "뻔"한 작품 느끼기/읽기로부터의 탈출이 가능해 진다. 그래서 세 작가를 이어주는 공통분모인 전시명제만 제외한다면, 각기 다른 분자들의 차이와 충돌이 야기한 서사와 형식이 화장기 없는 얼굴로 싱싱하게 비교되는데 이 전시구성방식의 장점이 있다. 거기에서 관객은 전시의 큰 흐름인 주제와, 디테일로서의 미감을 주체적으로 느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진하





Over there


이진혁展 / LEEJINHYECK / 李鎭赫 / painting 2011_0831 ▶ 2011_0906


이진혁_over there_장지에 채색_81×144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70712c | 이진혁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83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평일_10:00am~06:00pm / 주말_11:00am~06:00pm

미술공간현 ARTSPACE HYUN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B1 Tel. +82.2.732.5556 www.artspace-hyun.co.kr


평면화 된 도시 풍경: 이진혁의 근작을 통하여 ● 1998年 제작된 「Enemy of the State」를 감상하다 보면 영화의 주제와는 별개로 가장 발달된 문명의 이기 중 하나인 인공위성이 우리를 우주에서 내려다보는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 이진혁의 작업 모티브도 그렇게 시작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공간 밖에서의 시점이라는 소위, 전지적 시점에서 유기체처럼 변화하는 지구의 도시 풍경을 그리고자 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물이나 공간을 떨어져 객관적으로 관찰한다는 관점은 비단 예술 분야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며, 통상적으로 큰 사고(思考), 객관적 시각을 의미하여 큰 틀에 있어 긍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진혁_over there_장지에 채색_100×100cm_2011
이진혁_over ther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30cm_2011

그의 작품에서는 자연환경들이 인간에 의해 개발, 변화하고 있음을 한 눈에 쉽게 알 수 있다. 한강을 따라 개발되고 있는 모습들이 마치 콘크리트 덩어리들로 차갑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차가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네모진 건물들 사이에는 규칙적인 간격으로 초록색 가로수들이 위치하고 있으며, 곳곳에는 인간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시설들이 자리 잡고 있다. '편리함과 신속함'이라는 두 가지 명제를 위해 개발된 도시가 인간에게 갇혀서, 마치 중력을 따라 흐르는 물이 역행하는 듯한 느낌도 들게 한다.
이진혁_over there red z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50cm_2011
이진혁_over there_장지에 채색_50×50cm_2011

작가의 작업은 초기부터 지금의 근작까지 한 가지의 이야기 선상에서 작업이 진행되어 옴을 알 수 있다. 전작인 「Traffic Trouble'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라는 인공적 환경공간 안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이 되어버린 도시의 경험적 이야기들을 풀어 표현하였으며, 「Over There」와 같이 자동차가 마치 물결처럼 일렁이는 듯 우리네 힘든 일상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려했다.
이진혁_concrete jungle_종이에 아크릴채색_100×100cm_2009
이진혁_concrete jungle_종이에 아크릴채색_40×90cm_2009

이번 전시를 통해 '편리함과 신속함'을 추구하고 있는 도시개발의 현실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지만 한편으로 이렇게 표현된 도시가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공간이며 現시대이다'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연민과 함께 알 수 없는 친숙함으로 관객에게 다가설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흔히들, 도시를 '인간성 상실' 등(等)의 사유를 들어 폄하하는 관점이 많지만, 사실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도시에서 생활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면 앞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조금 더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도시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 김경민





숨 Soom(Breath)

이운갑展 / Gap Lee / 李云甲 / painting 2011_0831 ▶ 2011_0906


이운갑_숨-Blue lobster 140310_캔버스에 유채_116.7×80.3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운갑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83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82.2.736.6669 www.galleryis.com


이운갑 개인전에 부쳐-물구나무로 서서 죽음을 응시하는 심안(心眼) 모래에서 끝나는 육체, 모래에서 다시 시작하지 못하고 모래로 흘러 다니는 육체, 더 쪼갤 수 없이 잘게 쪼개져서 사막을 흘러 다니고 바람에 불려 다니는, 더 이상 육체라고 부를 수 없는 육체, 방황하는 모래들, 표류하는 모래들, 폭풍에 들려 빈 하늘에서 빈 하늘로 떼 지어 날아가는 모래들, 누구의 것도 아닌, 그 누구의 뼈도, 그 누구의 살도 아닌..._최승호 「모래인간」부분
이운갑_숨-Mole cricket 040511 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11
이운갑_숨-Mole cricket 220511_캔버스에 유채_116.7×72.7cm_2011

들어서며 ● 그의 오랜 머뭇거림은 대상의 존재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살았던 증거일 것이다. 체험에서 인식으로 옮아가는 작품의 형식은 오랜 기다림의 결론이며, 변화는 그리움과 아쉬움의 반영이다. 2003년 개인전 이후로 작가는 슬프고 기막힌 일들을 만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짧지 않은 시간을 생을 환멸하며 보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얻은 심안(心眼)으로 자연현상 배후에 있는 초월적 세계를 파악하고 조형화하려는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특정한 자극에 과민해진 상태에서 공평하지 못한 상황에 반응하는 신체를 근거로 한 작품들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연결되었다. 말하자면 사랑의 가능성을 일깨우는 힘겨운 조건을 형상화하여 잃어버린 순간들을 재조합해서 보여주는데, 이러한 고뇌의 결과는 어떤 경우든 부재에 대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 그러나 어느 정도는 단단해졌으리라 자부했으나 초월적 이미지를 일상의 체험 속에 고정시키려는 노력은 부족한 탄력으로 버석거린다. 슬픈 몽상은 이성을 견지하며, 삶의 경계에서 체험한 죽음은 그 자체로 삶의 한 형식이 되고 만다. 그러나 세상의 끝을 가정하는 사람이 매 순간을 경건하게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그 과정에서 어떤 곤궁한 생활도 그 끝은 순결하고 숭고한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인생에서 이치의 깨달음이란 아마도 포기의 다른 이름이다. 결국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에게서, 자연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자연으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한다. ● 구상화가로서 작가는 주로 자연의 서정적 풍경을 소재로 삼아왔다. 이제 가던 길을 멈추고 새로운 길에 오르는 것은 익숙해진 길 앞에서는 열정이 줄기차지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이 세상일에는 미숙할 수 있다는 의미임을, 그림 그리는 일이 오히려 그림에 상처를 주고 있다는 근심은 간직하고픈 열망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사물화 되고 마멸되는 삶의 과정에서 고뇌하는 자의식과 예지력이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인습화된 조형언어에 대한 강박증을 걷어내려는 중일 것이라 진단한다. ● 기억한다는 것은 최초의 순결한 정열 속에 오래도록 머무는 것을 의미하지만, 주변을 마모시키는 모든 것을 깊이 인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모든 현실의 두터움이 그림의 깊이가 되고, 세월과 함께 확장된 삶의 순결함에 유약한 마음이 가시화될 것이라 믿는다. 세상에 대한 적막한 심정이 그림을 그리게 만들었기에 그러므로 남아있는 삶에 의지하여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세상을 포용하면서 동시에 순수하게 남으려는 의지를 표현해 낼 것이라 믿어진다.
이운갑_숨-Common carp 140310_캔버스에 유채_53×33.3cm_2010

다가서기 ● 작품 대부분은 견고한 껍질을 지닌 바닷가재나 땅강아지의 그로테스크(grotesque)한 이미지가 숭고한 방식으로 허공에 놓여 있는 방식이며, 다르게는 현기증을 일으키는 반영의 허상 속에 몽환적 이미지가 당당하게 위치한다. 작가에게 바닷가재와 같은 갑각류는 마음의 창을 대변하는, 생명이 죽음과 같은 상태에 이른다는 깨달음의 독백이다. 이는 어떤 삶도 감히 넘나들 수 없는 혹은 침투 불가능한 방식으로 어느 날 그에게 열렸다. 견고하게 부풀어 방부처리 된 가재껍질에 응축된 에너지는 불가능해진 삶을 간직한 채 자신을 제거해감으로써 삶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한다고 작가는 유추한다. 현실의 두터움과 단단함은 외적인 존재를 지우다보면 더 이상 부재로 바꿀 수 없는 존재의 핵심에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 명상으로 떠올린 생명체를 형상화한 이미지는 사막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구도자 혹은 선지자의 모습처럼 숭고하다. 때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렸던 성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가능성의 대상으로서 작업의 중심 역할을 하는 강렬한 생명체들은 인간으로부터 죽음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보편적 맥락까지 이끌어 죽음과 소멸에 대한 내적충동을 강렬하게 시사한다. 이는 소멸되어가는 자연을 풍경 앞에 내세워 산업 폐해의 위험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려는 의도이며, 존재의 쇠락을 통해 끊임없이 창조와 변화와 생성이 지속됨을 인식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삼라만상이 문드러지는 세계 안에도 존재의 핵 같은 것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죽음은 자주 그에 대한 일종의 방패 막 구실을 한다. 초토화된 폐허의 땅에서 풀들이 일어서는 것처럼. ● 이러한 일련의 연작들은 지극한 은유를 포함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시각적 정보 그 이상의 논리가 있어야 이해가 가능하다. 이를테면 적절한 방식으로 연출된 공간에서 형태가 해체된 모래와 같은 존재, 육체가 증발하고 소멸한 개체의 형태 등으로 자연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상실해 가는 주변 존재의 비극을 인지하는 방법을 말한다. 자아의 통일성을 잃고 분열된 개체의 모습으로 쇠락해가는 존재를 파악하려면 그것에 내재된 비극성과 통찰의 배경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존재 저마다의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이끌어 가려는 작가의 의도를 엿보는 것은 그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전제 하에 그 다음 단계에서 가능하다. ● 변덕스러우면서도 예리한 상상력은 주위를 빛나는 카오스로 구성하고 현기증과 혼란의 감각에서 즐거움과 쾌감을 느끼는 유희적인 놀이와 유사하다. 그 반짝거림에도 불구하고 유기적인 연속성을 깨뜨리는 불안정한 차원의 이미지, 형태를 명확히 가늠하기 어려운 이미지들, 불행한 기억과 상처를 가진 사람의 그렁거리는 눈망울에 맺힌 이미지의 왜상(anamorphosis)처럼 작가는 세상을 그렇게 아프게 바라보고 있다. ● 배경은 황사로 혼탁해진 대기와 환경오염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묘사하는데 시인 최승호가 '모래인간'에서 표현한 '더 쪼갤 수 없이 잘게 쪼개져서 사막을 흘러 다니고 바람에 불려 다니는, 더 이상 육체라고 부를 수 없는 육체'처럼 인간이 덧없이 표류하고 해체되는 상황을 진단하고 있다. 원래의 빛인 생동하는 푸른빛을 잃은 채 황사로 뒤덮혀 버린 하늘은 먼지를 털어내려 애쓰지만, 그 먼지는 이미 몸 전체를 이루고 있다. 단단한 각오들이 삶 속에서 모래처럼 해체되고, 아름다운 것들과 사악한 모든 것이 현실에서 균질화 되었음을 에둘러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때로는 배경이 그림 전체의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의 구분이 무너진 도시, 물신화된 도시에서 외경심을 찾을 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진정한 소통 또한 소멸되어 있다. 값진 희생이 줄을 잇고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주의를 끌지 못한다. 이미 서로서로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림은 또한 이중인화(dissolving view) 형식을 취한다. 왜곡(anamorphosis)된 상으로 미끄러지는 도시 풍경은 자기 반영 이미지와 맞닥뜨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보이는 순간에 보이는 모든 것은 즉각성의 기만일 뿐이고, 안개처럼 산란하거나 황폐해진 현실은 현실이면서 낯선 현실로 비켜 서 있다. 살아온 날들에서 남은 기억의 응어리와 현기증이 차디찬 바닥으로 내려가 깔린다. 바닥의 본질은 내려앉는 무게를 감당하고 품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화면의 바닥은 마치 품에 안겨오는 존재를 밀어내듯 차갑게 반영한다. ● 이러한 불침투성의 세계에 작가는 상처받기 쉬운 삶의 여린 부분을 덧입혀 표현하고 있다. 사물의 물질성이 비물질화로,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초현실적 풍경으로 현실의 논리는 거듭 부정된다. 삶의 화사한 외양은 거침없이 찢겨나가며, 사회적 규범과 질서는 무시되거나 전복된다. 공중에 머물러 있는 생명체는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고 시간의 흐름을 거역하는 긴장감을 보여준다. 죽음을 향해 소멸해 가는 것이 생명체의 당연한 질서임에도 불구하고 해체된 존재들은 새로운 삶을 꿈꾸고 지향하는 모습으로 거듭난다. 그러한 과정을 모두 거친 후에야 시공간을 벗어난 황홀한 느낌과 함께 비로소 죽음의 종말을 생각할 것인가. ● 무기력한 땅강아지와 속이 텅 빈 바닷가재로 형상화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은 파괴된 인간성의 참담함을 나타내고 있다. 장수를 누려야 하는 생명체들은 견고한 껍질을 지니고 있지만 무기력하고 순응적인 모습이다. 교환가치로 전락한 시대에 사물의 고유성과 인간의 고유성은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바닷가재 혹은 땅강아지는 희생자로서 사회적 표현에 성공하지 못하는 재능은 결국 성장이 아니라 자기 파괴에 이르고 만다는 단단한 경구가 된다. ● 작가는 불순하고 추악한 현실에서 생명이 거기 있다는 것으로의 긍정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부정으로 대응한다. 작가의 나레이션(narration)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진중한 자세로 마지막 남은 생명을 추스르고, 소멸을 선택한 생명체들의 슬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거기에 '하나의 풍경으로 도시화 되어버린 지구촌 물질문명에 대한 고발'이라는 식상한 프래카드(placard)를 내걸기에는 관념의 무게가 상당하지만, 인식의 거대한 동굴을 지난 개인의 성찰이 터득한 의미라는 측면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식상함이 곧 보편성이기 때문이다.
이운갑_숨-Sunflower 010711_캔버스에 유채_38×38cm_2011 이운갑_숨-Sunflower 120611_캔버스에 유채_38×38cm_2011

나가며 ● 이운갑의 풍경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져버린 신비함이 있다. 두 세상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 하지만 죽음을 통해 삶을 풍요하게 만들고 삶을 통해 죽음을 긍정하게 만드는 모순 또한 존재한다. 죽음은 삶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있다는 점에서 죽음을 포용한 삶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어 오히려 삶에 대한 이해와 사랑의 폭을 넓히는 계기로 작용한다. ● 그러므로 실질적인 작업 또한 눈앞의 자연을 조합하고 재현하기에 앞서 정신적인 가치를 구현하고 인식의 범위를 확장시킴으로써 현시적 상징(presentational symbol)으로 자연 밖에 존재하는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자연 안에 존재하는 조화로운 세계에 순응하는 자연중심의 태도로 자연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를 목적으로 한다. 이제 자연으로 들어 설 때 작가는 자신이 세상만큼 넓어졌음을 인식한다. 자연을 형식적으로 표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연에 동의를 구하는 태도는 표현하는 바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능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간절함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 정직한 풍경화에 대한 그리움이 없지 않지만 시대적인 상황과 관계에 대한 고독의 결실을 선택해 특별한 주기를 가지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작업이다. 모진 사막을 건너온 사람처럼 고독한 길을 선택하여 고독의 질을 바꾼 결과물이며, 새로이 사는 인생의 분신들이다. 삶은 그것이 아무리 초라하고 지리멸렬할지라도 부스러진 온갖 파편을 긁어모아 우주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나면 두 세계 간의 통로가 뚫리게 마련이다. ● 이제 작가는 삶에 대한 시선을 내면으로 옮긴다. 삶을 안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눈은 결국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새벽을 비추는 여명은 어둠을 뚫고 불길한 모든 것을 밟고 일어나며, 상승의 끝에도 하강의 끝에도 초월은 있을 것이다. 그림은 죽음 너머 세계의 통로를 열고 그 죽음을 연습한다. 거꾸로 선 꿈을 위해 오래 간직해온 정열이 스스로 일어나 펄럭인다. ● 그는 그림의 당위성을 위해 암담한 조건들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가능한 실천 강령에 따른다. 그래서 붓끝에서 태어난 풍경이 자신이 헤치고 나온 가시밭길처럼 슬픔과 위로가 깃든 경건한 분위기이기를 바라고 있다. 적막함은 모든 인간이 광활한 자연 앞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초라함일 테지만, 자연의 황폐함을 바라보는 일은 인간의 어두운 과거와 하얀 미래가 함께 내장 된 곳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분노를 포함하고 있음이다. ● 또한 작가는 본질을 찾아 항해하는 각성한 자아로서 에코토피아의 풍경화를 기대한다. 조형성이 부족할 때는 의미에 기대게 되지만, 소재와 방법을 결정하고 확신이 들면 직관적인 형태로 인간의 내면적 감정세계를 표현하려 하게 된다. 그러나 예술 작품은 감정적 이미지의 단순한 논리적 허구이며, 대중의 가치행동을 유발하려는 실천적인 힘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피로감이 그러한 후유증이 아니기를 바란다. 작가가 스스로의 성에 갇혀있는 동안에도 대중의 미의식은 빠르게 심층적으로 변해갈 것이므로. ■ 주성열
2011.08.28 14:04:10 / Good : 361 +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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